▲ 신선아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

어느 공중파 방송사 자유게시판에 20년차 방송작가가 올린 게시글 제목은 ‘저는 이제 방송을 떠납니다’였다. 본인이 처음 작가 길에 들어선 그때부터 지금까지 십수 년이 지나도록 변하지 않은 열악한 방송작가들의 처우, 시사교양 및 다큐 프로그램들의 실종 등 여러 사유로 방송계을 떠난다는 이야기였다. 그 아래에는 위 방송작가의 고충과 심정에 적극 동감하는 여러 댓글이 달려 있었다. 방송작가가 되고 싶거나, 이제 막 방송작가를 시작한 새내기들의 설렘 가득 담긴 게시글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의 고충을 토로하는 여러 게시글 사이에서도 위 글은 유독 기억에 오래 남았다.

방송계 비정규직 관련 상담을 하면서 처음에 다소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 있다. 유독 방송계 비정규직과 관련해서는 참고할 판례나 노동부 질의회시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방송산업 내에는 프리랜서라 불리며 근로기준법 적용이 배제된 채 열악한 근무조건에서 일하는 직종들이 유독 많다. 이와 관련한 법적분쟁이 상당히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임에도 상황은 위와 같았다.

그러나 여러 건의 상담을 하다 보니 위 상황의 이유를 다소 이해하게 됐다. 상담자들은 상당수가 부당대우에 대한 적극적 문제제기나 법적 대응조치를 포기했다. 포기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프로그램 단위별로 방송판을 전전하며 단기고용을 이어 가야 하는 상황에서 좁은 바닥에 소문이라도 잘못 날까 싶은 걱정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런 걱정 때문에 실제 법적대응을 한 사례가 거의 없고, 관련한 법적판단도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최근 일부 상담자들은 적극적 문제제기나 법적 대응조치를 준비 중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담자들은 대부분 이미 방송계를 떠났거나, 조만간 떠날 것을 예정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방송계를 떠나야지만 그곳의 부당대우에 문제를 제기할 용기를 낼 수 있다는 참으로 모순적인 상황이 방송계의 현주소다.

상담자들은 말한다. 본인들이 방송계를 떠난 것은 너무 힘들고 나아질 희망이 보이지 않아서였지만 지금이라도 내 권리를 주장하고 인정받고 싶고, 그것이 방송계에 남아 있는 본인 같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들의 용기가 참으로 고맙지만, 이는 또한 그들이 떠나기 전 함께 용기 내어 바꿔 내지 못한 방송계 현실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이기도 하다. 위 20년차 방송작가의 게시글이 유독 눈길을 끈 이유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지난해 10월26일 방송계의 비인간적 노동관행을 개선하려 노력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이한빛 PD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뒤늦게나마 방송판의 부당노동 관행과 열악한 처우가 공론화됐다.

그동안 숨죽여 온 그들이 비로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1월11일에는 방송작가들이 모여 노동조합(전국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을 만들었다. 현재 노조 가입의사를 밝힌 방송작가들이 1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노동조합 출범식에서 "화장실에서 혼자 울지 말고, 노조하자"를 수차례 외쳤다. 직장내 부당대우와 불공정 관행에 맞서 온라인 모임 등을 통해 대응방안을 모색해 보고자 만들어진 직장갑질119는 업종 특성을 고려해 ‘방송계 비정규직’을 대상으로 하는 별도 오픈채팅방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방송계 부당관행과 불공정 문제를 공유하고, 위로하고, 수다 떨며 함께 대응방법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혼자 힘들어하지 말고, 함께 용기 내어 목소리를 내고, 함께 바꿔 보자는 시도다.

한편 고 이한빛 PD의 유가족은 고인의 뜻을 계승하고 추모하기 위해 기금을 출연해 사단법인 ‘한빛’ 설립을 준비 중이다. 방송산업 미조직·비정규 노동자들의 상담과 지원을 할 것으로 전해졌다. 사단법인 한빛으로 인해 방송산업 비정규 노동자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됐다.

부디 이런 움직임에 힘입어 앞으로는 화장실에서 혼자 울거나, 혼자 힘들어하며 방송계를 떠나는 결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으면 좋겠다. 조금만 용기 내면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본인 같은 사람들을 여럿 만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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