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화영 전국공무원노조 음성지부 조합원

유완형 사무총장 후보는 ‘작은 거인’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사람이다. 160센티미터가 안 되는 아담한 체격에 선한 학자풍의 얼굴이지만 싸움에선 물러섬이 없다.

고향이 경북 안동인 유완형 후보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대학진학을 일찍 포기하고 약관의 나이에 노동판에 뛰어들었다. 1980년 풍산금속 부평공장에서 6개월에 걸친 직업훈련을 마치고 울산에 있는 온산공장에서 금속노동자로 기름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년간 죽도록 일했다. 하루 13시간 노동은 기본이었고, 24시간 철야근무를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피곤이 겹겹이 쌓이면서 아차 하는 순간 손목이 날아가고 손가락이 잘리는 산업재해사고가 빈번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산재처리는 먼 나라 얘기였고, 근로기준법은 ‘화중지병’에 불과했다.

유 후보에게 있어 나아지지 않는 삶에 대한 돌파구는 공부였다. 그는 3년간의 공장생활을 접고 병역을 마친 후 상경해 1년을 준비한 끝에 공무원시험에 합격, 서울에서 공무원노동자로 새 출발을 한다.

유 후보는 공무원 신분이었지만 1987년 노동자대투쟁 당시 동거 동락했던 금속노동자들과 한 몸이 돼 투쟁 대열에 합류해 싸웠다. 노동자들은 이 투쟁으로 정부 주도의 노동조합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시대를 여는 계기를 만들었다.

유 후보는 부패하고 반칙이 횡행하는 공직사회와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노동조합 설립에 대한 갈증으로 목말라 했다. 그러던 중 공직사회에 노동조합 설립의 물꼬가 트이면서 노조간부를 거쳐 2010년부터 2016년까지 내리 3선으로 전국공무원노조 서울본부 동작지부장을 역임했다. 이후 서울지역 본부장에 출마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됐다.

그는 30년 넘는 공직생활 중 절반인 15년간 공무원노조를 반석 위에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정권의 공무원이 아닌 국민의 공무원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노동조합’이라는 신념이 그를 노조간부의 길로 이끌었다.

유 후보는 정치권과의 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치단체장이 고무줄 잣대를 적용한 부당한 인사를 단행하자 구청을 비롯해 시내 주요 거리에서 1인 시위를 이어 갔다. 그 결과 인사시스템을 바꾸는 단초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자치단체장이 금품수수 의혹과 특정 업체 밀어주기 특혜에 연루돼 검찰 수사를 받자 지역 주민들에게 대신 사과하는 성명을 발표해 경종을 울렸다.

그는 또한 지난 2012년 구의회 해산을 요구하기도 했다. 지역 주민을 무시한 채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과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이 끊임없이 대립하면서 2013년 예산을 의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문제는 구의원 퇴출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구의원들의 의회 출입을 봉쇄하기도 했다.

유 후보는 공무원노조 조직 내 갈등으로 위원장이 민주노총을 탈퇴하는 혼란 속에서 서울본부 소속 지부의 조직 이탈을 온몸으로 막아 냈다. 일부 출혈이 있긴 했지만 그의 노력이 없었으면 조직이 두 동강 나는 아픔을 맛봐야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들에게 노동하기 좋은 나라, 차별받지 않는 건강한 세상을 물려 줘야죠". 오늘도 유 후보가 운동화 끈을 바짝 조여 매는 이유다. 힘내라 유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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