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

<전태일 평전> 첫머리에서 조영래 변호사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얘기하려는 전태일은 누구인가? 전태일(全泰壹).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노동자.

1948년 9월28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랐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선언’이라고 부른다."

그가 분신 항거한 지 47년이 지났습니다. 그가 자기 몸을 불사르며 ‘인간선언’을 한 지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평화시장 앞 길거리, 그 아스팔트 위로는 그때의 그 바람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전태일다리(버들다리) 위로 수없는 오토바이가 흐르고 있습니다. 평화시장 들머리 아스팔트는 북적거리고 출근할 곳도 없는 익명의 전태일, 오늘 아침도 그날의 명보다방에서 큰맘 먹고 쌍화차 한 잔을 마십니다.

언제부터인가 이름만 바뀌었습니다. 시다는 시급 아르바이트로, 날품팔이는 비정규직으로, 구멍가게는 동네마트로, 그 많던 전당포는 어디서나 만나는 현금인출기로 겉만, 이름만 번드레해졌습니다. 리모델링으로 온통 색유리로 겉을 댄 평화시장, 그 속에 평화는 여전히 없습니다.

47년이 지났습니다. 불탄 시신을 검은 땅에 묻고, 300만 노동자의 대표 기독 청년 전태일이라 묘비를 세운 지.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청년 기독이 40일 금식기도로 스스로를 이기고 광야에서 세상으로 나오듯, 이스라엘 민중이 40년의 사막생활로 이집트 종살이를 끝장내듯, 그 40년이 가고 또 7년이 더 지났습니다.

이제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오늘도 거리에 넘쳐 나는, 그날 풀빵을 나눠 주던 어린 여공들, 이름만 바뀐 비정규 노동자, 원천해고의 청년실업자, 노동기본권도 박탈당한 특수고용 노동자, 이주노동자, 최저임금 노동자, 최저임금이라도 받기 위해 싸우는 노동자, 시급 아르바이트, 안전 사각지대의 실습생들, 막개발에 쫓겨난 철거민, 기업농에 밀려난 소농 노동자, 단속에 목숨을 건 노점상, 후려치기 하청단가에 악덕사업자로 몰리는 영세·중소 자영업자들, 원청의 갑질에 전전긍긍하는 하청업체들, 온갖 차별과 성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노동자들, 성소수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그들에게 돌아와야 합니다. 아니 그들 모두가 전태일이가 돼 온갖 억압의 사슬을 스스로 끊고,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부활해야 합니다.

평화시장 앞 근로기준법을 끌어안고 함께 불탄 그 자리에, 작은 표지동판 하나 묻었습니다. 그리고 버들다리를 전태일다리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 다리 한가운데 한 손은 하늘로 한 손은 땅으로, 연민과 고뇌의 얼굴로, 일 년 내내 먼지바람 뒤집어쓰고 있는, 허리 잘린 청년 전태일 동상 앞에 조그만 불꽃 하나 피우기로 했습니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해방의 불꽃 하나, 전태일과 함께 전태일이 돼 전태일로 살려고 다짐하는 모든 이의 마음에 타오를 따뜻한 불씨 하나 피우기로 했습니다.

올해도 스스로 불씨가 되기 위해 지난 12일에는 무시와 차별을 극복하고 당당한 노동자로서의 첫출발을 다짐하는 전국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 학생 100여명이 전태일이 분신한 자리에 모여 권리선언을 하며 모두 전태일이 되자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47주기인 13일에는 전국 100여개 노동단체로 구성된 노조하기좋은세상운동본부 회원 1천113명의 이름으로 전태일 동상 앞에 모여 사회적 선언문을 발표하며 “모든 노동자에게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촉구했습니다.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 동창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으로, 전태일이 우리 모두에게 남긴 유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중략) 이 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못다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전태일재단 이사장 (presiden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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