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4년 전 한국사회학회지에서 <삼성 백혈병의 지식정치>라는 논문을 읽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활동을 보면서 개인의 질병이 어떻게 사회운동으로 발전했는지 1년반 동안 추적한 ‘현장연구’ 결과물이었다. 논문은 피해노동자와 대항 전문가들이 질병과 공장환경의 인과성을 놓고 정부와 삼성을 상대로 싸우는 과정을 촘촘히 기록했다.

노동자의 ‘절박한 과학’과 대항 전문가의 ‘사려 깊은 과학’이 결합한 진영 구축은 지리하고 험난했다. 대항 전문가들은 중립성과 객관성으로 위장한 실증주의 과학의 위험을 비판하고 과학의 공공성을 위해 과학을 재구성해야 함을 웅변했다.

삼성은 처음엔 정부(산업안전보건연구원)를 끌어들였다가 실패하자 국제네트워크의 권위를 동원했다. 세계적 공신력을 가진 연구기관, 학술단체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재조사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미국 컨설팅회사 ‘인바이런’이 선정됐다. 인바이런은 2011년 7월 삼성 반도체공장의 유해물질 노출 수준이 국제기준보다 상당히 낮고 화학물질들을 잘 관리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반올림의 대항 전문가들은 인바이런의 발표를 즉각 반박했다. 현재 공장환경에 근거해 과거 위험을 평가했고, 삼성이 제공한 자료와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개별역학조사 자료만을 바탕으로 했다는 거다. 나아가 반올림은 인바이런의 연구를 ‘청부과학’이라고 지적했다. 클린턴 정부의 에너지부 차관보를 지낸 데이비드 마이클스가 쓴 같은 이름의 책에도 청부과학의 대표주자로 인바이런이 나온다.

이 논문을 쓴 사람은 김종영 경희대(사회학과) 교수였다. 이후에도 언론에서 몇 번 더 김 교수의 소식을 들었다. <사회학회 ‘올해의 저서상’ 김종영 교수, 상금 전액 반올림 기부>(경향신문 2016년 1월4일자)라는 반가운 제목으로 김 교수를 다시 봤다. 김 교수는 한국 학계의 대미 종속성을 15년에 걸쳐 추적연구해 펴낸 <지배받는 지배자>로 그 상을 받았다.

반면 하루에도 수십 개 신문에 증명사진을 박고 나오는 헛똑똑이 지식인도 즐비하다. 1년은 한겨레에, 다음 1년은 동아일보에, 다시 중앙일보에 돌아가면서 칼럼 쓰는 이도 있다. 그들을 볼 때마다 김 교수 같은 이를 생각하며 위안받는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83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펴낸 <한국의 가난한 여성에 관한 연구>를 집필한 여성사회학자 손덕수 교수도 현장성 깊은 연구만 해 왔다. 특히 도시빈곤 여성의 노동과 삶에 대한 손 교수의 시선은 늘 따뜻했다. 손 교수는 1982년 여름 발품 팔아 가며 성북구 달동네 140여 가구를 일일이 찾아가면서 글을 썼다.

11월15일자 동아일보(경제 2면)와 경향신문(1면 톱)은 ‘외환위기 20년’ 맞이 기사를 썼다. <외환위기가 부른 사회변화 ‘비정규직 증가’ 손꼽혀>와 <끝나지 않은 고통, 대가는 ‘비정규직 공화국’>이었다. 두 신문 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여론조사를 근거로 삼았다. 국민 88.8%가 ‘비정규직 증가’를 외환위기가 한국에 끼친 으뜸 영향이라고 했다.

비정규직은 외환위기 때도 늘었지만, 진짜 많이 늘어난 건 3저 호황과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난 1985~1990년 5년 사이였다. 통계청 경제활동부가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 반대편에 있는 정규직(상용직) 비율은 85년 62.8%에서 90년 54.2%로 무려 8.6%포인트나 줄었다. 반면 1998~2003년 정규직 비율은 53.1%에서 50.5%로 2.6%포인트 주는 데 그쳤다.

우리가 대공장노조운동에 열광했던 85~90년에 비정규직이 미친듯이 늘었다. 자본은 위기를 예감하고 80년대 중반부터 비정규직 확대에 혈안이었다. 그러나 어떤 지식인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진보연하는 지식인이 만든 엉터리 신화 때문에 온 국민이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 급증했다고 믿는다. 최근에도 한겨레신문에서 그런 지식인의 글을 읽었다. 몹시 불편하다. 이당 저당 기웃거리며 각종 위원회에 얼굴 내미는 진보연하시는 분들은 공부 좀 하시든지, 아니면 땀 냄새 나는 연구라도 했으면 좋겠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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