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정기훈 기자

대법원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뇌종양에 걸려 숨진 노동자의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뇌종양은 반도체·LCD공장에서 백혈병 다음으로 많이 제보되는 직업병이지만 대법원에서 산재를 인정한 것은 처음이다.

“부실한 역학조사, 근로자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야”

대법원 특별3부(주심 대법관 박보영)는 14일 오전 삼성전자 온양사업장에서 일하다가 뇌종양으로 숨진 고 이윤정(사망 당시 32세)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산재요양 불승인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씨는 1997년 5월 입사해 반도체 조립라인의 검사공정에서 근무하다가 2003년 7월 퇴사했다. 그런데 2010년 5월 뇌종양(교모세포종) 진단을 받고 같은해 7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어 소송을 제기했고 병세가 악화돼 2012년 5월 사망했다.

이번 소송에서는 유해물질 노출정도와 역학조사 신뢰성이 핵심쟁점이었다. 서울행정법원은 △고인이 벤젠·포름알데히드·에틸렌옥사이드·납 같은 유해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점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에서 화학물질 중 일부에 대해서만 조사가 이뤄진 점 △발병 원인이 될 만한 개인적 이유가 없는 점을 이유로 들어 이씨의 병을 업무상질병으로 인정했다.

서울행정법원은 특히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규명되지 않은 사정은 상당인과관계를 추단할 때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정황으로 참작함이 마땅하다”며 허술한 역학조사 문제점을 지적해 주목을 받았다. 반면 서울고법은 역학조사를 근거로 유해물질 노출정도가 낮았고, 고인이 퇴사 뒤 7년이 지나서야 뇌종양 진단을 받은 사실을 이유로 1심 판결을 뒤집었다.

대법원은 1심 판결을 대부분 수용했다. 대법원은 역학조사 한계를 인정했다. 이씨가 근무한 지 한참 지난 시점에 역학조사를 실시했고, 일부 유해물질이 조사 대상에서 빠졌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망인이 퇴직 후 7년이 지난 다음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는 점만으로 업무와 관련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뇌종양이 빠른 성장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종양의 성장·악화가 빠르다는 것이지 발암물질에 노출된 후 발병까지 이르는 속도도 빠르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이날 보도자료에서 “산업현장에서 상시적으로 노출허용기준 이하의 유해인자에 노출되는 근로자에게 그 발병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희귀질환이 발병한 경우 전향적으로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했다는 것이 이번 판결의 의의”라고 밝혔다.

뇌종양 제보자 29명 중 2명만 산재 인정받아

대법원 판결로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린 노동자들의 소송이 잇따를 전망이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에 따르면 현재까지 삼성이나 LG의 반도체·LCD 공장에서 일하다가 뇌종양에 걸렸다고 제보한 사람은 29명이다. 이 중 11명이 산재를 신청했는데 근로복지공단은 단 한 명만 업무상재해로 인정했다.

산재를 인정받지 못한 노동자·유족 중 이씨를 포함해 3명이 소송을 제기했다. 나머지 2명 중 한 명은 패소가 확정됐고 한 명은 1심 재판 중이다.

이씨 소송을 대리한 임자운 변호사는 “현재 산재신청이나 소송을 고민하고 있는 뇌종양 피해자들이 많다”며 “이번 대법원 판결이 다른 반도체 공장 뇌종양 사건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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