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1998년 1월 김대중 정부가 노사정위원회(현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에서 처음으로 꺼낸 대화 주제는 정리해고제였다. 국가부도를 막으려면 정리해고제를 즉각 도입해야 한다며 정부는 민주노총을 밀어붙였다. 정리해고제는 정부가 추가 구제금융을 얻어 내기 위해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에 약속한 구조개혁 중 하나였다. 미국의 금융가들과 정부의 압박, 국가부도라는 어마어마한 정세 속에서 민주노총은 2월에 결국 정리해고제와 파견제가 포함된 노사정 사회협약을 체결했다. 당시 사회협약에는 재벌개혁·사회보장제도 개선·실업대책·노동기본권 보장 등이 포함됐으나, 결과적으로 곧바로 협약의 효과를 발휘한 것은 정리해고제와 파견제뿐이었다.

김대중 정부에게 노사정위의 절박성은 사회적 대화에 있지 않았다. 정권이 공식적으로 출범하기도 전에 시작된 노사정위는 미국과 IMF에 노동계가 정부 통제하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IMF 추가 구제금융이 이뤄진 뒤 정부가 사회협약을 어떻게 다뤘는지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민주노총은 1998년 6월 초에 사회협약을 보완해 추가적 노사정 사회협약을 체결했지만 정부는 협약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55개 민간기업과 5대 은행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다음 달에는 11개 공기업과 21개 출자회사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고, 또 그다음 달에는 현대자동차와 만도기계에 대규모 공권력을 투입했다. 정부는 사회적 대화를 앞에서 이야기하며 뒤에서 노조 와해를 위한 파업유도 공작(조폐공사)을 폈고, 롯데호텔과 사회보험노조 파업에는 특공대가 투입돼 노동계를 상대로 말 그대로 전쟁을 벌였다. 사회적 대화를 거부하고 투쟁에 나선 민주노총 위원장은 곧바로 수배됐고, 2000~2001년에는 위원장을 잡겠다며 정부는 사복경찰 수백명을 집회장소 주변에 풀어놨다. 자, 이것이 우리나라의 사회적 대화, 노사정위의 시작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제도는 상당한 경로의존성이 있다. 제도의 발전 경로는 그 시작점에서 벗어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재벌과 관련한 경제 관행과 제도들이 수많은 경제민주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잘 고쳐지지 않는 것이나, 냉전 시기 형성된 한미관계가 계속 이어지는 것이나, 지역주의에 기대 발전한 정당들과 정치 관행이 반복되는 것은 다 이런 제도의 경로의존성을 보여 준다. 노사정위도 마찬가지다. 정리해고제에서 시작한 노사정위는 ‘참여’를 내건 노무현 시대에도 그다지 바뀌지 못했고,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친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에서는 아예 의도적으로 무시됐다. 경로의존성을 깨고 변화를 도모하려면 외부에서 큰 힘이 가해지거나, 내부의 일관된 장기적 개혁이 이어져야 한다. 노사정위에는 그런 변화의 계기가 없었다.

지난주 민주노총이 대통령 간담회에 참가하지 않은 것을 두고 여기저기서 말이 많다. 정부에 대한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 문재인 대통령의 열혈 지지자들이야 그러려니 생각한다. 그런데 노동운동 전문가들이 민주노총 비난 여론에 기대 노사정위 참여 또는 사회적 대화 참여를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많은 제도들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노사정위라는 제도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정리해고제로 출발한 노사정위는 사회협약을 노동시장 대안으로 제시하는 국책연구소마저 “버리고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구다. 여러 형태의 사회적 대화와 관련해서도 문재인 대통령이 어떤 로드맵을 가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이 없다. 물론 민주노총 역시 준비되지 않았다. 어차피 만나 봤자 할 이야기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경제제도나 사회제도 개혁 관련해서는 경로의존성을 주장하며 근본적 구조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노사정위나 사회적 대화 관련해서는 그리 조급하게 참여를 주장하는지 도통 이유를 모르겠다.

민주노총과 정부, 그리고 사용자단체가 머리를 맞대고 무엇을 논의할지부터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지향이 다른 주체들이 모여 대화해 봤자 뒷담화와 불신만 쌓일 것이다.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란 말이 있다. 정부가 이야기한 임금주도 경제성장을 위해서 노동소득분배율 상향조정을 목적으로, 또는 정부가 강조해 온 노동존중 세상을 위해서 노조할 권리 실질화와 노조 조직률 향상을 목적으로 새로운 사회적 대화 기구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노사정 대화의 지향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정리해고제로 시작한 현재의 노사정위와 사회적 대화는 노사정 모두에게 청산해야 할 “적폐”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적폐가 자동으로 청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민주노총을 비난하며 정리해고제로 시작한 노사정위에 참여하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과학적이지도 역사적이지도 않은 주장이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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