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9.10.23 수 08:00
상단여백
HOME 칼럼 연재칼럼 민변 노동위의 노변政담
촛불 1년을 돌아보며권영국 변호사(전 민변 노동위원장)
권영국 변호사(전 민변 노동위원장)

1년 전 10월29일, 비선실세에 의해 국정이 농단되고 권력이 사유화돼 국가의 공적 질서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민들 수만명이 청계광장으로 뛰쳐나와 촛불을 들고 ‘이게 나라냐, 박근혜는 하야하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집회와 시위라면 이골(?)이 난 나였지만 내게도 이 날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청계광장이 비좁아 행진을 나가는 데에만 엄청난 시간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날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와 열기는 국정농단에 맞서는 투쟁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광화문을 찾는 집회 참가자가 1주 간격으로 몇 배씩 증가하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3만명에서 20만명, 20만명에서 100만명, 뭐 이런 식으로 광화문의 집회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그 힘은 바로 시민들 스스로의 경악과 분노, 그리고 무관심과 방관에 대한 자성과 자발적인 참여에 기인한 것이었다.

자신의 주권과 민주주의가 공적인 기구나 인물도 아닌 권력자와의 사적인 관계에 있는 자에 의해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을 다친 것이다. ‘돈도 실력이다. 네 부모를 원망해’라고 했던 정유라의 글은 이 땅의 불평등이 얼마나 심각하고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 깨닫게 해 주는 기폭제가 됐다. 자존심을 다친 시민들은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을 만들어 냈고, 탄핵소추안 결의를 유보한 국회를 향해 232만명이 전국을 가득 메움으로써 234명의 국회의원이 박근혜 탄핵안을 가결시키는 기적을 일으켰다. 삼성재벌 총수는 구속되지 않는다는 신화를 깨고 이재용을 구속시키고, 국정농단의 몸통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시켰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100미터 앞까지 행진할 수 있는 집회와 시위의 권리를 확보했다. ‘이게 나라냐’며 자조해야 했던 이 땅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시민들이 떨쳐 일어나 민주주의를 복원시켰다. “적폐를 청산하라. 사회를 대개혁하라. 반칙과 특권이 없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자”고 6개월에 걸친 촛불항쟁에 나섰던 1천700여만 촛불시민들은 요구했다.

그리고 그 힘으로 마침내 정권을 바꿔 냈다. 정권이 바뀌고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국정역사교과서를 폐기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지시하고, 세월호 기간제 교사의 순직을 인정하고, 세월호 7시간의 거짓을 밝혀내고, 4대강 감사를 진행하고,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추진하고, 노조 조직률 제고를 위한 정책 지원을 약속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에게, 백남기 농민 사망에 대해, 검찰의 과거 인권침해에 대해 사과하고, 국정원·검찰·경찰에 개혁위원회를 설치해 과거에 자행했던 범법행위를 조사하고 개혁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다. 개혁적인 대법원장을 임명해 사법부 개혁도 추진 중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을 마주하고 있다. 새 정부가 이전 정권의 알박기에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사드 배치와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둘러싼 정부의 갈지자 결정이 대표적인 예다. 문재인 대통령 재임 초기 "잔여 사드 발사대 4기 국내 유입 보고가 누락됐다"며 "그 국내 유입 경위에 관한 진상을 조사하고 사드 배치는 엄격한 전략환경영향평가를 거쳐 추진하겠다"고 한 약속을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이유로 뒤집고 성주 소성리 주민들과 국민의 반대 여론을 공권력으로 짓밟은 채 사드발사대 배치를 강행했다. 5·9 대선 직전인 지난 4월 말 성주 소성리에 사드 발사대 2기가 기습배치된 것은 미국의 압박이 아닌 황교안 대통령 대행체제에서 당시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미국으로 건너가 사드 조기배치를 요청해 이뤄진 사실이 밝혀졌다. 새 정부에서 번복하지 못하게 사드 알박기를 시도한 것임이 충분히 예상된 것이었음에도 스스로 환경영향평가 절차를 무시하고 추가 사드 배치를 강행해 적폐 정권의 알박기에 면죄부를 줘 버렸다.

신고리 원전 5·6호기의 건설 중단은 애초부터 공론화의 대상이 아닌 대통령 공약사항이었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중단이 일부 반대여론에 부딪히자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 국민의 여론에 따르겠다고 입장을 선회했다. 건설 중단을 반대하는 주장의 핵심 논거는 공사가 이미 28%나 진행돼 매몰비용이 2조6천억원에 이르러 경제적 손실이 크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역시 한국수력원자력이 건설 허가도 나기 전인 지난해 6월까지 신고리 원전 5·6호기 사업비로 1조1천576억원을 사용함으로써 원전 건설을 기정사실로 만들려는 알박기 공사를 진행했음이 밝혀졌다. 결국 한국수력원자력의 알박기 공사에 국민의 공론을 빌어 면죄부를 준 결과가 됐다.

알박기 행위에 면죄부를 준 정책은 적폐청산과 사회개혁에 결정적인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알박기 정책 관행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국가의 미래와 운명을 좌우할 잘못된 정책조차 시정할 수 없다는 전례를 남기기 때문이다. 잘못된 정책이라도 알박기하면 된다는 신호를 주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비용이 들더라도 이를 시정하는 모범을 보여 줬어야 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안보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주국가로의 희망에, 핵발전소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사회를 갈망했던 미래세대의 염원에 빨간불이 켜졌다.

적폐세력들의 저항이 다시 거세지고 있다. 방송 정상화를 위한 파업과 시정절차를 방송장악으로, 적폐세력에 대한 진상규명과 단죄를 정치보복으로 둔갑시켜 저항하고 있다. 반개혁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혁 목소리들이 다시 모여야 한다. 촛불이 계속돼야 하는 이유이다. 실질적인 적폐청산과 사회개혁은 이제부터다.

권영국  labortoday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권영국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