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내게는 평생 떨치지 못하는 구차한 장면이 하나 있다. 1989년이었다. 설인지 추석인지 기억을 온전히 신뢰할 수는 없지만, 아마 가을이 아니었을까 싶다. 공단에서 쏟아져 나오는 노동자들 손에는 선물꾸러미 한두 개씩 들려 있었는데, 누구도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하여간 그날은 명절 연휴 전날이었다. 나는 주안역 방면 인천5공단 앞에 서 있었다. 삼원프라스틱노동조합 사무장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술 한잔 얻어먹기로 약속돼 있었다.

학생운동을 마친 나는 인천에서 활동을 시작한 지 2년째 되는 새내기 노동운동가였다. 각자 활동비는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노동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만 25세, 한창 혈기 왕성한 청년, 위장은 모래도 소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집이 가난했고 어디서 돈 끌어오는 재주도 없었기에, 늘 배고팠고 술도 고팠다. 누군가 밥과 술을 산다고 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날은 삼겹살을 먹기로 예정돼 있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민주노조시대가 열리고 노동자 임금이 가파르게 인상되자, 공단을 중심으로 값싸고 맛있고 배부른 삼겹살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통해 생애 처음 삼겹살을 먹었다. 주안역과 공단 사이에 위치했던 허름한 가게,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으며 눈과 코를 유혹하던 조각들, 부드럽게 씹히던 촉감, 고기에 붙은 오돌뼈를 오도독 오도독 씹는 또 다른 식감, 충만하게 차오르던 위장, 얼큰한 술기운, 배고픈 청년이 그 기억을 어찌 잊을 수 있겠나.

아무튼 약속보다 일찍 도착한 상태였다. 공단 쪽에서는 계속해서 노동자가 쏟아져 나왔다. 그 행렬을 보면서, 전국 노동자들이 해방투쟁에 어깨 겯는 모습을 상상했다. 가슴이 벅찼다. 온몸을 던져서라도 그날을 반드시 이루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다가 나도 내일은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집에 들어가는 상태였다. 나와 가족에게도 명절이라는 생각이 들자, 내 눈은 노동자들 손에 들린 선물꾸러미로 향했다. 당시 공단 노동자들이 받아 나오는 선물꾸러미 속에는 수건 몇 장에 비누 몇 개 등이 고작이었는데, 나는 그것조차 챙길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도 명절인데. 선물상자 하나 들고 집에 들어가면 엄마가 좋아할 텐데. 나는 선물꾸러미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부러웠다. 구차하다 싶은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아도 이내 되돌아가곤 했다. 그를 만나 삼겹살을 굽고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마음속에선 쉽사리 떨쳐 버리지 못했다. 그렇게 그날의 그 선물꾸러미들은 심장 깊숙한 곳에 박혔다. 그리고 나이를 먹어 오면서 나는 종종 흠칫했다. 나는 자꾸만 그날의 나를 아리게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로부터 28년, 강산은 네댓 번 이상 바뀌었다. 새천년에 접어들었고 벌써 17년이나 흐르고 있다. 음식물쓰레기가 사회문제로 떠오른 것은 이미 한참 전이다. 그런데 아직도 당시 운동가들처럼 활동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노동조합 바깥 노동운동에 있고, 시민운동에 있고, 풀뿌리운동에도 있다. 특히 인권운동에 많다.

인권운동가들의 월평균 활동비는 100만원이 안 된다. 분명 100만원 넘게 받는 활동가들이 있는데, 평균 100만원에 못 미친다고? 그렇다면 인권운동의 누군가들은 몇십만원으로 활동을 이어 가고 있는 셈이다. 차비 쓰고 통신비 내고 점심 먹고 나면, 한 푼도 남지 않는 경우도 있단다. 나처럼 담배라도 태우는 경우에는 불감당일 것이다. 술값에 책값 따위는 엄두도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고 있단다. 제아무리 인권에 대한 소명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다 해도, 어느 날 갑자기 내면으로 파고드는 가시는 막을 수 없는데. 어느 한 순간의 조그마한 가시가 두고두고 마음을 구차하게 하고 삶의 방향을 통째로 바꿀 수도 있는데. 과거 활동가가 그렇게 활동했으니까, 지금 활동가도 그렇게 활동해야 한다면서 방치하면 안 되는데. 과거엔 대다수 운동사회가 궁핍했고 진보사회 대부분 밑바닥에 있었으니까 그래도 동의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민주주의 역사에 인권운동이 없었다고 가정해 보자. 명박산성 앞에, 또 살수차 앞에 인권활동가들이 없었다고, 그동안의 노동자들 투쟁에, 또 세월호참사 집회에 인권운동가들이 없었다고 가정해 보자. 수많은 백남기로 죽어 가야 했을 것이다. 운동과 진보는 정부·재벌의 폭력에 더 많이 퍽퍽 고꾸라졌을 것이다. 미주알고주알 부연하지 않아도 다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손잡자.

‘인권 이즈 커밍’이란 제목의 스토리 펀딩(storyfunding.kakao.com/project/16951)이 진행되고 있다. 계좌로는 '신한은행 100-020-833848 인권재단 사람'이다. 딱 한 번만 술값을 아끼자. 아니 안주를 조금만 저렴한 것으로 바꾸자. 그것으로 월 몇십만원에 밤샘과 한뎃잠을 밥 먹듯 하면서도 제 입으로 들어가는 밥은 챙기지 못하는 인권활동가들에게 손을 내밀자.

역사는 계단식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나선형으로 굴러간다. 그렇기에 또다시 뒤로 후퇴할 수 있는 것이 역사다. 그때 인권운동가들이 없다면 어찌 되겠는가. 재앙일 것이다. 인권에 대한 소명의식 하나로 꾸역꾸역 힘겹게 버티고 있을 인권운동가들을 외면하지 말자. 운동과 진보사회에도 염치는 있다. 우리는 인권운동에 큰 빚을 졌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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