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추석 황금연휴 첫날 10만명 해외로 해외로' '고향 대신 해외로 110만명 이상 몰려 출국대란 우려' '유통업계 큰손 키덜트족 나홀로 황금연휴 매출 상승 기대' '현대백화점 추석 D턴족 잡아라' '신세계 나홀로 추석을 … 혼추족을 잡아라' '열흘 뒤 다시 태어나자 … 황금연휴 성형외과 북적' '수능 40여일 앞두고 추석 연휴 공부법'….

이상은 추석연휴 직전 언론이 쏟아 낸 최장 연휴 트렌드 기사제목들이다. 한결같이 열흘 쉰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사람을 넘어 언론의 동물사랑도 애틋해 ‘사상 최장 열흘 추석연휴 … 버려지는 반려동물’이라는 제목의 기사도 여러 곳에서 나왔다. 이 기사를 보면서 1978년 3월20일 저녁 동일방직과 해태제과·원풍모방 등 해고노동자 30여명이 기독교방송사 보도국에 들어가 생방송을 일시중단시키면서까지 외쳤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광릉 숲에 크낙새가 죽으면 크게 보도하면서 해고자는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긴 연휴 후유증을 염려하는 기사도 ‘추석연휴 해외여행 먹는 물·모기 조심하세요’ ‘긴 추석연휴 후유증 없으려면…’ 같은 제목으로 쏟아졌다.

과연 모든 국민이 다 열흘을 쉬었을까. ‘직장갑질119 준비위원회’가 지난달 30일부터 7일까지 8일 동안 직장인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이번 연휴 중 1~3일만 쉰 사람이 절반에 가까운 44.05%였다. 응답자의 68.96%가 6일 이하로 쉬었다. 구글 시트를 이용해 만든 설문을 직장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인터넷 카페 등에 올려 538명으로부터 받은 응답이었다.

‘직장갑질119 준비위원회’는 노동건강연대·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한국비정규노동센터 등 노동·사회단체들이 만든 조직이다. 준비위는 직장에서 벌어지는 온갖 불합리한 관행과 직장내 갑질을 찾아 세상에 알리고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되찾는 운동을 추진하고자 이달 말쯤 공식 출범한다.

조사 결과 추석연휴에 근무하는 이유는 회사 또는 상사가 시켜서라는 응답이 50.37%로 과반을 넘겨 대부분 비자발적 노동이었다. 국민 절반이 3일 이하로 쉬는데 언론은 열흘 이상 긴 연휴를 어떻게 이용할지 온갖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늘어놓은 셈이다.

추석연휴 때 쏟아진 기사 중 최악의 기사는 ‘롯데월드타워 황금연휴 내내 문 연다’였다. 재벌 돈벌이에 홍보대행사 역할을 자처한 기사였다. 연휴 내내 문을 연다고 기뻐 손뼉 치며 기사를 써 대면서도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 처지를 한 번이라도 생각했을까.

택배기사들이나 안전 관련 업무를 하는 예외적인 상황을 빼고도 열흘 연휴를 온전히 보낸 국민이 절반도 안 되는데 이런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건 비정상이다.

그 다음 최악의 기사는 청와대발로 나온 ‘쉴 땐 확실히 쉽시다’였다. 남들 쉬는 연휴에 박탈감을 느끼며 일해야 하는 중소기업이나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호통쳐야 할 언론이 청와대가 쉬는 것도 솔선수범한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으니. 연휴 쉬고 나서 열린 청와대 회의에서 총리의 퉁퉁 부은 눈이나 청와대 참모 환자 속출 같은 가십거리를 ‘연휴 뒤 청와대·정부 부상 투혼’이란 제목으로 기사랍시고 쓰는 한심한 이들도 있었다. “격무를 하다가 긴장이 풀렸는지 다들 병이 난 모양”이라는 경제보좌관의 친절한 부연설명과 함께.

누가 들으면 큰 병이라도 얻은 줄 알겠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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