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1921년 황해도 옹진반도에서 태어난 허창성 회장은 열네 살 때부터 빵집 점원으로 일했다. 10여년 일하다 해방을 맞아 그동안 배운 기술로 45년 10월 고향에서 ‘상미당’이란 작은 빵집을 차렸다. 48년 서울로 진출한 상미당은 방산시장에서 출발했다. 61년 용산에 본사와 공장을 마련하면서 ‘삼립’이란 이름을 처음 내걸었다. 때마침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가 혼분식 장려운동으로 밀가루 소비를 촉진한 데다 바로 옆 미군기지에 군납업체로 선정돼 삼립빵은 급성장했다. 67년 가리봉동 산 67-2번지에 큰 공장을 세웠고, 69년엔 공장 옆에 신사옥까지 세워 본격적인 가리봉동 시대를 열었다. 71년 시흥공장, 78년 아이스크림 공장까지 전국에 여러 공장을 세워 호황을 누렸다.

허 회장은 75년 기업공개에 이어 77년 50대 중반에 일찍부터 서서히 경영에서 손을 뗐다. 큰아들에겐 삼립식품의 여러 공장을, 차남에겐 성남의 샤니공장만 물려줬다. 큰아들의 사업은 지지부진했다. 반대로 차남은 일찍부터 제빵에 전력투구해 승승장구했다. 차남은 형의 삼립식품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차남이 키운 기업은 오늘날 파리바게뜨와 파리크라상·베스킨라빈스31·던킨도너츠를 거느린 식품 대기업 SPC그룹이 됐다.

여기까지 들으면 뻔한 재벌 가족사다.

삼립식품 역사에 ‘73년 9월18일’은 특별하다. 가리봉동 공장에서 장시간 저임금에 시달리던 어린 여공들이 이날 일제히 파업에 들어갔다. 2천600명의 노동자 가운데 1천여명이 아침부터 공장 맞은편 야산으로 올라가 파업을 했다. 노동자들은 평일엔 12시간씩 주야 맞교대로, 주말엔 18시간 연속근무하는 살인적 장시간 노동으로 회사를 굴지의 기업으로 키웠지만, 돌아온 건 쥐꼬리만 한 월급이었다.

이들이 점거파업 대신 인근 야산으로 찾아든 것만 봐도 자신의 일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파업 중 불가피한 노사 충돌로 시설물이 파괴되는 걸 막고 싶었던 게다.

삼립식품엔 68년 화학노조 지부가 설립됐지만 73년 파업 때 대부분 노동자는 노조가 있는 줄도 몰랐다. 노조 지부장은 69년부터 화학노조 위원장까지 겸했지만 정작 자기 공장 노동자들 처우개선엔 눈을 감았다. 파업을 주도한 건 입사 3년차 노동자 정유성(당시 23세)이었다.

이들이 야산으로 올라간 73년 전체 근로자 월평균 임금은 2만5천433원이었다. 반면 월평균 소비지출액은 3만6천600원이었다. 당시 대다수 노동자가 적자가계를 꾸렸다. 73년 굴지의 삼립식품 3년차 여공 월급은 1만8천57원으로 이보다 더 낮았다. 그것도 살인적 초과근무수당을 다 합친 돈이 그랬다. 이 여공의 한 달 기본급은 6천524원에 불과했다. 연장수당 4천503원, 휴일수당 2천282원, 야근수당 3천30원, 월차와 생리휴가까지 반납하고 받은 수당 1천715원까지 합쳐야 겨우 1만8천원에 도달했다. 기본급보다 3배나 많은 수당을 받으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연장노동을 했을까.

야산으로 올라간 노동자들은 임금 50% 인상과 주 하루 휴무, 12시간 연속작업 개선, 점심시간 확보를 요구하며 농성했다. 당시 삼립식품은 이렇게 일을 시키면서도 공식 점심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저 적당히 눈치껏 먹어야 했다.

다급해진 회사는 파업 3일째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회유했고, 순진한 노동자들은 회사 약속을 믿고 공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회사는 20% 임금인상과 주동자 13명 연행으로 답했다. 연행자 중 6명은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국가보위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기계적 균형을 맞춘답시고 검찰은 회사 대표도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입건했지만 벌금 3만원으로 끝났다.

근로기준법에 8시간 노동이 있었지만 휴지 조각에 불과했다. 현장에서 8시간 노동제를 진짜로 관철시킨 건 여성노동자들이었다. 73년 삼립식품 파업과 76년과 79년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의 특근·잔업 거부 투쟁 끝에 식품업계는 80년부터 8시간 근무제를 받아들였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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