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새로운 시대가 얼마나 새로울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새로운 시대가 무엇이 돼야 하는지(당위, Sollen)에 대해서는 미리 이야기하고 꿈꿔 볼 수 있다. 현실은 언제나 꿈대로, 말대로 되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려면 먼저 역사를 좀 알아야 한다.

조직노동과 시장의 사이즈가 커지면서, 민주적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노동-자본 관계는 언제나 역동적으로 변화하면서 전개돼 왔다. 노동은 늘 보다 큰 대표성(조직력)을 향해 움직이지만 대중사회에서 노조의 노동대중 장악력에는 많은 변수들이 작용해 결과가 맺어졌다. 자본은 언제나 최적의 효율적인 시장조건을 향해 목소리를 높여 왔고, 노조가 커지는 것은 달갑지 않은 장애물이었다.

그럼에도 민주주의 성숙과 자본주의 성숙은 모두 양자의 성장을 가져왔다. 언제부턴가 둘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물론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수십 년에서 100년 넘게 긴 갈등과 반목의 시간이 필요하곤 했다. 인정은 대화를 낳았고, 그것은 시스템을 형성했다.

국가는 보호와 안정을 기대하는 노동, 경쟁력과 유연성을 강조하는 자본 사이에서 현실의 사회·경제 운용을 위한 정책적 방점을 어디에 둘지를 놓고 양측과 상호작용을 전개했다. 그것은 때론 이자주의(bilateralism)의 모습을, 때론 삼자주의(tripartism)의 모습을 띠기도 했다. 어찌 됐든 그러한 실천을 우리는 코포라티즘(corporatism)이라는 용어를 써서 지칭했다.

코포라티즘은 두 가지 측면을 갖는다. 하나는 시스템(system)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협의와 조율을 향한 행위(action) 측면이다. 전자는 제도화된 사회적 대화기구를 국가·업종·지역 수준에서 구축하는 일이다. 기업 내에 구축하는 경우도 있다. 후자는 현안을 놓고 이해당사자들 간에 일시적인(ad hoc) 협의테이블을 구축한 뒤 숙의(deliberation)를 전개해 새로운 결론을 찾는 일이다. 때로 그 결론은 사회협약(social pacts)으로 물질화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시스템을 구축해서 행위를 하기도 하나, 시스템이 행위의 전제조건은 아니다.

행위 측면의 코포라티즘은 1970년대 이후 크게 두 차례 흐름이 형성돼 있었다. 하나는 70년대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60년대 말 격화했던 노동운동 부대가 국민경제를 생각하며 임금양보를 하고 대신 복지증진을 도모하려는 시도였다. 이른바 네오코포라티즘이라고 칭해진 이러한 실천은 이 분야의 새로운 이론화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그런 후 80년대 이른바 신보수주의의 시대가 되면서 이러한 시도는 사라지는 듯했다.

웬걸. 90년대 접어들어 오히려 그러한 신자유주의 흐름이 지배화되면서 코포라티즘은 새롭게 등장하게 됐다. 세계화로 인한 경쟁력 제고의 필요성이 커지고 생산입지 경쟁이 격화하면서 고용 지키기를 원하는 조직노동은 일정하게 유연화를 용인하고 복지와 임금을 양보하면서도 일종의 방어적 성격의 대화에 임하게 된다. 코포라티즘의 2막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러한 실천은 이른바 ‘이중화 시대’ 도래를 막지 못했다. 노동시장 중심부와 주변부는 점점 멀어졌고, 노동조합은 주변부를 향한 특단의 새로운 조치들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나라들은 지금 여기에서 헤매고 있다. 특히 노동조합의 특단 조치 중에 새롭게 사회적 대화의 3막이 열릴 수 있을지가 주목되는 바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녹록지 않다. 주변부를 향한 특단의 조치들이 중심부 양보를 요구할 때 중심부 구성원들이 웬만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사이 신자유주의화된 노동시장은 전반적으로 노동조합의 조직력과 대표성의 약화도 초래한 상태다. 조직력 쇠퇴는 정치력과 정책역량 쇠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의 극단에서 특정 국가는 포스트-네오리버럴리즘을 향한 새로운 정책적 결단과 패러다임 전환을 생각할 여지가 있다. 경쟁력이 사회통합을 희생시키는 것도 정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미래세대에게 질 나쁜 일자리만을 제공할 수 있고, 이는 사회적 시민권의 세대 간 차등배분이라는 정책실패를 초래하게 된다.

오늘날 회자되는 포용적 성장론은 여기에 착목한다. 그리고 포용성과 안정성 증대는 자연스럽게 민주성 강화로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이야기하는 노동존중 사회는 포용성과 민주성(대표성) 증진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은 그저 국가가 독단적으로 수행하기만 하면 될까. 신자유주의 시대가 자본에 기울어진 국가의 정책선택 속에서 코포라티즘의 2막을 열게 했다면, 이제 기울어진 운동장을 메우고 사회통합을 증진시키려는 국가의 노력은 또 다른 대화 필요성을 증대시키지 않을까.

사회적 대화의 3막은 패러다임 전환이 격할수록 어쩌면 더욱더 그 기회가 열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그것을 포용적 코포라티즘이라 부르고 싶다. 어쩌면 한국이 세계적으로 그 선두주자로 나설는지도 모르겠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해 본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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