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에이비엘생명보험(옛 알리안츠생명보험)은 지난해 1월 고용노동부가 공정인사(일반해고) 지침을 발표한 지 5개월 만인 같은해 6월 저성과자 프로그램을 부활시켰다. 과거에는 저성과자 프로그램을 한시적으로 운영했다.

회사는 최근 3년간 평가를 통해 61명을 저성과자로 분류했다. 3개월을 평가해 저성과자들을 ‘졸업’과 ‘잔류’로 나눴다. 잔류한 노동자 25명은 경고를 받았다. 서울남부지법은 올해 8월 "징계는 무효"라고 판결했지만 회사는 저성과자 프로그램을 강행하고 있다. “몇 명은 반드시 해고한다”던 회사 방침과 달리 해고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런데 회사측은 최근 2차 저성과자를 지정해 교육에 들어갔다. 평가기준도 납득하기 어렵다. 3년간 인사평가에서 한 번이라도 S등급과 A등급을 맞으면 저성과자로 분류하지 않는다. 반면 1년차나 2년차 평가에서 아무리 B를 맞아도, 마지막 3년차 평가에서 C나 D를 받으면 무조건 저성과자가 되는 희한한 방식이다.

제종규 알리안츠생명보험노조 위원장은 25일 <매일노동뉴스>와의 통화에서 “회사가 2차 프로그램 선정 인원과 잔류 인원을 공개하지 않아 답답한 상황”이라며 “정부가 양대 지침을 폐기했지만 현장은 여전히 저성과자 프로그램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제 위원장은 “지침 폐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노동부가 기업 인사프로그램을 철저히 점검하고, 합리적인 인사체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지난 정부 주도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법원이 제동

노동부가 공정인사 지침과 취업규칙 해석 및 운영 지침을 발표 1년8개월 만에 폐기했다. 두 지침은 해고를 쉽게 하거나 임금삭감을 용이하게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두 지침을 발표하면서 “불확실성 해소와 노사갈등·분쟁 해소를 위한 가이드라인”이라고 주장했다. 해고나 임금삭감을 쉽게 하는 게 아니라 풍부한 판례를 제시하고 기준과 절차를 명확히 한 지침이라는 논리였다.

노동계는 “사용자들의 쉬운 해고와 임금삭감을 부추기는 행위”라고 반박했다. 부작용은 금방 나타났다. 취업규칙 해석 및 운영 지침에 따른 갈등은 지난 정부 주도하에 급속도로 번졌다.

기획재정부는 노동부가 지침을 발표한 지 엿새 만인 지난해 1월28일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권고안'을 내놓고 성과연봉제를 밀어붙였다. 금융위원회는 같은해 2월 초 ‘금융공공기관 성과중심 문화 확산방향’을 발표했다.

노동자 과반 동의 없이 성과연봉제를 강행하는 기관이 늘어났다. 성과연봉제를 도입하거나 확대한 254개 공공기관과 80개 지방공기업 중 31%가 노사합의 없이 이사회 의결만으로 제도를 도입했다. 법적 분쟁이 잇따랐다. 2009년 지침과 비교하면“근로자 과반 동의가 없어도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으면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이 아니다”는 부분을 강조한 노동부 지침 영향이 컸다.

철도공사를 필두로 성과연봉제 확대 결정이 무효라는 법원의 가처분 결정이 이어졌다. 올해 5월에는 주택도시보증공사 노동자들이 본안소송마저 이겼다. 그러자 기재부는 6월 성과연봉제 지침을 공식 폐기했다. 노동부의 취업규칙 해석 및 운영 지침도 휴지 조각이 됐다.

지침 오남용 막지 못한 정부

공정인사 지침은 취업규칙 해석 및 운영 지침과 차이가 있다. 취업규칙 해석 및 운영지침은 근로감독관을 대상으로 한 지침 성격이 분명하지만 공정인사 지침은 판례를 나열한 가이드라인 성격이 짙다. 그럼에도 산업현장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정부가 공정인사 지침을 발표했을 당시 노동계와 전문가들은 “이렇게 자르면 소송에서 지지 않는다는 시그널을 정부가 사용자들에게 던진 것”이라고 비난했다.

실제 지침 발표 엿새 뒤 이기권 당시 노동부 장관이 30대 기업 노무담당 총괄임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한 대기업 임원이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하위 10% 정도는 통상해고를 해야할 사람들인데, 그럼에도 해고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2대 지침으로 기준과 절차가 명확해짐으로써 경영계 입장에서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에이비엘생명보험처럼 기존에 없애거나 중단했던 저성과자 프로그램을 재가동하는 기업이 늘어났다. 골든브릿지투자증권에서는 올해 회사측이 저성과자 퇴출제 시행계획을 발표하면서 노사갈등이 불거졌다. 한국마사회는 직원 일정 비율을 무조건 저성과자로 분류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노동부의 공정인사 지침에도 배치되는 내용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8월 두 지침 오남용을 우려했다. ‘지침’이라는 용어 사용을 자제하라고 권고했다.

노동부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노동부는 지난해 12월 공정인사 가이드북을 배포하면서 “최근 현장에서 공정인사 지침의 취지와 달리 자의적인 평가와 퇴출을 위한 교육훈련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인사제도 합리화 물건너 가고
현장 노동자 고통은 현재진행형 


정부가 공정인사 지침을 발표하면서 내세운 명분은 글자 그대로 ‘공정인사’였다. 노력도 하지 않고 성과도 없는 직원에 대한 직무능력 향상 조치가 필요하고, 부당노동행위 일환으로 일반해고를 강행하는 사용자에 대한 제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동부는 이를 위해 지난해 3월부터 8개 권역에서 ‘민관합동 능력중심 인력운영 지원단’을 운영했다. 지원단의 역할은 △지역 내 설명회와 사례 발표회 △현장밀착 교육 △중소기업 상담·컨설팅 지원 △갈등 해소와 우수사례 발굴이었다. 양대 지침의 오남용 방지 목적도 있었다.

하지만 "직무능력·성과중심 인사체계를 구축한다"는 당초 취지에 걸맞은 성과를 남기지는 못했다. 양대 지침 비판여론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지원단 활동은 사실상 중단됐다. 양대 지침 오남용 사례에 대한 조치도 언론사에 보도된 사업장을 대상으로 사실확인을 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에이비엘생명보험 사례에서 보듯 공정인사 지침이 던진 신호는 아직까지 산업현장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노동자들만 피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김기선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사실 공정인사 지침 폐기는 큰 의미가 없다”며 “노동자들의 의견이 반영되는 합리적인 인사평가 제도 설계가 취지였지만 분쟁만 늘어나고 노동시장에 해고유연화 시그널만 줬다”고 비판했다. 지침을 폐기했다고 해서 구조조정이나 노조탄압·보복 등으로 저성과자 해고를 악용하는 산업현장 관행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다.

김기선 연구위원은 “더 큰 문제는 문재인 정부가 합리적이고 공정한 인사체계를 만들려는 노력을 할지 불분명하다는 점”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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