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애림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교육선전팀장

어떤 폭력적 가장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아내가 독자적인 재산권이나 양육권 등 어떠한 권리도 갖는 것에 반대하며, 가정의 일은 원칙적으로 가장인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뜻을 거스를 경우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꺼리지 않는다. 이런 억압과 불평등한 관계를 견디다 못한 아내가 집을 나갔다. 주위 사람들은, 그래도 그가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일단 집으로 돌아가라고 아내를 설득한다. 부부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담보해 줄 어떠한 실질적 변화도 없는데도, 아내는 일단 집으로 돌아가야만 할까.

다시 한 번 사회적 대화기구 참여 문제가 노동조합을 압박하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 사무총장의 10여년 만의 한국 방문도, ILO 가입 이후 사반세기 넘게 미뤄지고 있는 핵심협약 비준 문제도, 모두 노동계에 사회적 대화기구 복귀를 주문하는 정부 의제(어젠다)로 뒤덮여 버렸다.

국제적 노사정 기구 성격을 가진 ILO가 사회적 대화(social dialogue)를 중요한 정책적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중요한 전제가 있다. 바로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는 부단한 진보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기본원칙(국제노동기구 목적에 관한 필라델피아선언)이다. 따라서 노동자 이익을 증진·옹호하기 위해, 모든 노동자가 “사전인가를 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해 단체를 설립·가입할 수 있는 권리” “단결권을 행사하는 노동자에 대한 보호” “노사 간 자율적 단체교섭의 촉진” 등을 선언한 87호·98호 협약은 회원국 비준 여부와 상관없이 ILO 회원국에 구속력을 가진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러한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헌법 6조)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1948년 제헌헌법 이래로 노동기본권으로 천명한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온전히 보장하지 않고 있다. 근로계약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노동을 제공한다는 이유로 특수고용·불안정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설립신고조차 어렵다. 자신들의 노동조건에 대한 실질적 지배력을 가진 원청을 상대로 단체교섭을 할 수도 없고, 원청을 상대로 쟁의행위를 하면 계약해지·업체폐업·업무방해죄 적용과 손해배상·가압류에 시달리게 된다.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는 자주적인 노조의 단체교섭권 박탈을 넘어 노조로서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노조파괴 부당노동행위 수단으로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노동기본권 무시와 결사의 자유 침해행위를 중단하고 단체교섭을 촉진시키기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에 대해 ILO는 20여년간 유사한 권고를 되풀이해 왔다. 다음이 대표적이다.

“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해당 사회적 파트너들과의 협의를 통해 노동법상 모든 노동자들에게 보장된 바,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결사 자유와 단체교섭 권리보호 증진을 위해, 그리고 이들 노동자들의 결사 자유와 단체교섭권 행사를 실제적으로 막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하도급을 남용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적절한 기제를 개발할 것을 요구한다.”

“위원회는 노조할 권리 행사를 회피하기 위해 사내하청을 활용한다는 지속되는 혐의에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위원회는 이 점에 관해 관련 노조와 간접고용 노동자의 고용기간·조건을 결정하는 당사자 사이의 단체교섭이 항상 가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위원회는 화물차량 운전기사와 같은 자영노동자(self-employed worker)를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이 자신들 권익증진과 방어를 위해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조직을 통해 그 어떤 사전적 승인조치 없이 해당 조직 규정에 따라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연맹과 총연맹에 가입할 권리를 포함해 결사의 자유를 전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한국 정부에 요구한다.”

정부는 노동계에 사회적 대화를 종용하기 전에 헌법과 국제노동기준에 따른 노동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중단하고 억제하는 일부터 해결해야 한다.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교육선전팀장 (labory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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