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지난 29일 다발성 경화증에 걸린 삼성전자 LCD공장 노동자의 산업재해를 인정했다. 대법원에서 노동자쪽이 승소한 삼성전자 산재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다. 산재요양을 불승인한 1·2심은 역학조사를 주요 판단근거로 삼았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역학조사에서 “충분한 의학적 검토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업무 관련성이 높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냈다. 의학적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희귀질환인 데다 업무 관련성까지 입증해야 하는 노동자에게 애초부터 소송은 불공정한 게임이었다. 더군다나 삼성전자는 영업비밀이라며 화학물질 정보 공개를 거부했고, 고용노동부 태도도 다르지 않았다. 대법원이 이를 비판하며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해야 한다”고 일갈한 것이 놀라울 정도다. 전문가들에게 이번 판결의 의미를 들었다.

산재보험은 사회보험인가?
박혜영 노동건강연대 활동가(공인노무사)

박혜영 노동건강연대 활동가(공인노무사)

오늘도 여전히 직업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정말로 암이 직업병일 수 있느냐’고 묻는다. 아니 일을 하다가 손가락이 잘려도 그리 묻는다. 메탄올에 실명된 노동자들 모두도 물었다. “저 진짜 산재보험 신청할 수 있어요?” 하고. 답답하다. 매번 이런 질문을 받으니 도무지 근로복지공단이 왜 산재신청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신청도 어려운 산재보험은 승인받는 것마저도 힘들다.

삼성반도체 다발성 경화증 소송에 걸린 시간은 7년이다. 직업병에 걸린 한 개인이 감내하기에는 아주 긴 시간이었다. 한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 졸업을 하고도 남는 세월이다. 어디 시간뿐인가. 그 세월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싸움을 지속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녀가 혼자서, 개인으로 아플 때 수십 수백명의 피해자와 유족, 또 사회운동가들이 첨단산업 직업병 피해자라고 외치고 싸웠다. 그런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방진복을 최첨단산업의 가장 안전한 상징으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삼성에 다니지 않았던’ 한국 땅에서 일하다가 다치고 병에 걸리는 노동자들이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부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나.

이번 판결에서 대법원은 산재보험의 목적과 취지를 살폈다. 지금 제일 먼저 그걸 새겨야 하는 집단은 노동부·근로복지공단이다. 기업보다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정부기관이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돌아보라. 산재 인정을 막기 위해 노동자 개인들을 상대로 소송을 하고 노동자와 그 가족을 벼랑으로 몰지는 않았는지, 노동부는 이를 방조 또는 장려하진 않았는지. 이대로 가면 4대 사회보험에서 산재보험을 빼야 한다는 원성을 듣게 될 것이다.
 

최초의 입증책임 전환 판결
유성규 공인노무사 노무법인 참터

유성규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참터)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주목할 점은 ‘사업주가 영업비밀 등을 이유로 화학물질의 정보나 유해성을 공개하지 않을 경우, 이를 재해노동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해야 한다’고 판단한 부분이다. 노동계가 주장해 온 입증책임 전환을 직접적인 법리를 차용해 판결을 내렸다.

노동자나 그 가족은 기업에서 다루는 화학물질 정보를 얻기 어렵다. 따라서 화학물질과 직업병 간 인과관계를 의학적·객관적으로 증명하는 데 한계가 있다. 결국 정보나 시간·경제적 능력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는 산재노동자가 직업병임에도 산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에 노동계는 ‘직업병을 유발시키는 물질을 다루는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물질과 관련된 질병이 발생하면 일단 직업병으로 인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자’고 주장해 왔다. 노동자들이 직업병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나 근로복지공단이 인과관계를 반증할 경우 직업병에서 배제하는 방식을 취하자는 것이다. 산재보험이라는 사회보험 법리에도 맞고, 산재노동자가 산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을 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 법원에서 입증책임 전환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적은 있지만 직접적인 법리를 차용해 판결까지 내린 것은 처음이다. 이번 판결이 입증책임의 전환 법리가 더욱 확장되고 공고해 지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산재 입증책임 전환 논의 방치한 노동부·국회 반성하라
권동희 공인노무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권동희 공인노무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업무상질병의 입증책임을 전환하자는 논의는 이미 십년이나 지났다. 이번 판결은 10년의 세월을 방치한 고용노동부와 노동부에 끌려다닌 정치권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대법원은 전자산업 직업병의 경우 명확한 의학적 인과관계 규명이 어렵다고 판결했다. 또한 역학조사는 당시의 상황을 기초로 조사한 것이므로 예전 작업환경을 파악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판시했다. 이번 사건 조사에 있어 이소프로필알코올 등 기초물질에 대해서도 확인·측정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천안지청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유해화학물질의 위험성에 대한 공개를 거부함으로써 사업주인 삼성의 산재은폐에 공모했다. 그동안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은 역학조사가 ‘과학적이고 실질적인 입증을 하는 기구’로서 ‘노동자의 부담을 덜어 준다’고 했다. 결국 이번 판결로 노동부·근로복지공단·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거짓말이 확인된 셈이다. 사회적 안전망으로서 작용하고, ‘산업사회가 원활하게 유지 발전하도록 하는 윤활유’ 같은 기능을 한다는 산업재해 제도개선에 과연 정치권이 얼마나 노력을 경주했는지 반성해야 한다. 판결 하나로 제도가 바뀌지는 않는다. 다만 왜 제도가 바뀌어야 하는지 이 판결문을 보고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관료든, 정치인이든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다.


과오 바로잡는 법·제도 개선 필요
이종란 공인노무사(반올림)

이종란 공인노무사(반올림)

대법원이 29일 삼성전자 LCD공장 노동자에게 발병한 희귀질환인 다발성 경화증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삼성전자 반도체·LCD에서 일하다 병에 걸린 노동자가 대법원에서 산재를 인정받은 첫 사례로 매우 중요한 의미다. 대법원 판결은 개별 화학물질 노출 수준이 낮다고 간과할 것이 아니라 여러 유해요소에 대한 복합적·누적적 작용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이 역학조사 방식 자체에 한계가 있고, 사업주의 협조 거부, 행정청의 조사 거부나 지연에 대해 노동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특히 대법원 판결은 희귀질환의 경우 전향적으로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해 공적보험이라는 산재보험의 본래 목적과 기능을 강조했다.

나는 이 세 부분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행정청은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사업주가 영업비밀로 자료도 제공하지 않았는데, 이런 부분을 유리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아예 쐐기를 박았다. 그동안 근로복지공단과 노동부는 다 노출수준 이하라고 하면서 다 불승인해 왔다. 이건 그동안 과오에 경종을 울리는 거다. 대법원 판결처럼 앞으로 근로복지공단, 역학조사기관인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전향적인 태도를 기대한다. 나아가 입증책임 전환 등 보다 손쉽게 산재 인정이 될 수 있도록 법·제도가 구체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대법원 판결 취지를 살려서 구체적으로 법을 바꿔야 한다. 곧 국회 국정감사가 진행된다. 국회에서 행정기관을 제대로 감사해야 한다.


역학조사 방식 개선하고 업무상재해 인정범위 확대해야
조기홍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연구소 실장

조기홍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연구소 실장

지난 29일 대법원은 삼성전자 LCD공장 노동자에게 발병한 희귀질환인 다발성 경화증을 산업재해로 인정했다. 증상이 발생한 지 14년, 산재요양을 신청한 지 7년여의 긴 세월 동안 고통받았을 노동자를 생각하면 울분이 치솟지만 지금이라도 대법원이 산업재해로 인정한 것을 환영한다. 노동자가 일을 하다 병에 걸리면 당연히 산업재해로 인정받아야 하는데도 대한민국 노동자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역학조사 방식의 한계와 영업비밀을 내세워 화학물질 정보를 숨기려는 사업주와 이를 인정하는 정부가 합작해 노동자의 업무상재해 인정을 방해해 왔다. 현행 공단에서 실시하는 역학조사는 한계가 너무 많다. 노동자들이 과거에 지속적으로 화학물질에 노출돼 직업병이 발생했는데도 현행 역학조사는 과거 상황을 무시한 채 현재 상황에 대한 노출평가만을 근거로 하고 있다. 당연히 화학물질 노출이 없거나 낮을 수밖에 없다. 이는 역학조사가 아니라 현재 노출수준을 평가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이를 근거로 업무와 관련성이 낮다고 평가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역학조사시 사업주의 협조 거부나 은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사업주가 악용하고 있는 유해화학물질 정보에 대한 영업비밀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노동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정보는 어떠한 경우도 영업비밀이라 할 수 없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산재보험 제도의 목적과 취지를 깊이 있게 반영한 것으로 정부는 이번 판결을 계기로 업무상재해 인정범위를 확대하고 산업재해 입증책임을 노동자가 아닌 사업주와 정부의 책임으로 전환하는 제도개선을 해야 한다. 더 이상 유해화학물질로 인해 노동자가 직업병에 걸리거나 이를 인정받기 위해 고통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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