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문재인 정부가 지난 29일 내년 정부 예산안을 내놨다. 조선일보는 1면에 이어 4면과 5면을 털어 해설기사를 썼다. 4면 머리기사엔 “5년간 빚내서 복지에 푼다”는 자극적인 제목을 시작으로 5면엔 “현금 줘 소득 늘려 주기”라고 제목을 달아 ‘묻지마 퍼주기 예산’임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 4면 아래쪽엔 <SOC와 R&D엔 푸대접 … 예산 11조 삭감>이란 제목의 엉뚱한 기사로 정부 예산을 비난했다.

대표적인 사회간접자본(SOC) 확충 법안인 교통시설특별회계법에 따른 교통시설특별회계 예를 들어 보자. 올해는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개통 50년째다. 사회간접자본이 극히 부족했던 개발독재 시절에 이런 법은 큰 위력을 발휘했다. 교통시설특별회계법은 1993년 ‘10년 한시법’으로 제정됐다. 우리는 반세기 동안 교통시설 건설에 자원을 최대로 동원했다. 그 결과 우리는 사람보다, 환경보다, 안전보다, 자동차 소통만 우선하는 국가 기간교통망을 가진 희한한 나라가 됐다.

자전거 도로조차 개발독재 시절처럼 빨리빨리 건설에만 집중하는 웃지 못할 나라가 됐다. 자전거 길을 만든답시고 인도를 잘라 내는 일도 흔하다. 여의도에 붉은색으로 차도를 다이어트해 자전거 전용도로를 만들어 놨지만, 점심시간만 되면 높은 양반들 것으로 보이는 검은 승용차가 자전거 도로 중간중간에 수없이 불법주차돼 있다. 그 양반들은 왜 검은 차만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여름에 검은 차는 흰 차보다 3도 가량 더 뜨거워 효율적이지도 않은데. 왜 국회의원들에게 달마다 막대한 유류비를 주는지도 모를 일이다. 국회의원이 화물노동자도 아닌데, 자동차 천국인 이 나라에서 월급명세서에 유류비 꼬박꼬박 받는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인구 550만명에 자전거만 600만대 이상 가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은 자전거 천국이다. 중앙역을 나오면 족히 1천대는 주차가 가능한 자전거 주차장이 있다. 우리는 주말에 지하철 양끝 두 칸에만 겨우 자전거를 들고 타지만, 코펜하겐 전동차는 홀수칸엔 사람이, 짝수칸엔 자전거가 탄다.

‘기승전 자동차’ 우선정책은 반세기 동안 자동차회사와 정유사·토목건설사의 이해를 대변해 왔다. 공교롭게도 세 업종 모두 재벌이 과점한다. 이들은 2003년 끝났어야 하는 한시법인 교통시설특별회계법의 가장 큰 혜택을 누렸다. 한시법은 상당한 자동차도로 인프라가 구축된 지금도 영구법처럼 군림하고 있다. 법 명칭부터 ‘시설’이란 단어가 들어 있으니 가히 토건족들의 전유물이다.

이 법에 따른 특별회계는 2015년에도 여전히 도로예산에 절대 다수인 9조원 이상을 쏟아부었다. 올해 특별회계 14조6천46억원 중에서도 상당수가 도로예산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조선일보는 SOC 예산을 줄였다고 난리다.

‘지속가능한 교통망’을 만들려면 지금이라도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신규건설 중심이 아닌 유지보수와 안전·사람 중심 대중교통 육성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통시설특별회계법을 폐지하거나 전면개정이 불가피하다.

녹색교통 중심지 독일 프라이부르크에 가면 도심 전체에 하루 종일 차가 들어오지 못한다. 상인들을 위해 새벽과 밤에 잠시 자동차 통행을 허용할 뿐이다. 이 시간엔 식재료와 제품, 음식물 쓰레기 등을 나르는 트럭이 주로 드나든다.

유럽 주요 도시 대부분도 프라이부르크와 비슷하다. 뒤늦게 자본주의를 만끽하는 체코 프라하의 구도심 광장도 마찬가지다. 프라하 옛 시청사에 설치된 천문시계탑·성당·왕궁 모두 그렇다. 수많은 정치인과 지방자치단체장이 유럽의 배울 만한 녹색도시를 보고 왔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경복궁과 창덕궁 앞까지 관광버스가 들어가도록 허용한다. 참 이상한 나라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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