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아버지가 오디오 시스템을 사 오셨다. 카세트 데크가 두 개였고, 층층이 뭐가 많아 크고 높았다. 덩치 큰 스피커 위엔 고음을 보강하는 작은 스피커가 따로 달린 최신의 것이라고 아버지는 설명했다. 당시 집마다 오디오 들이는 게 유행이었는데, 늦었지만 친구들에게 할 말이 생겨 기뻤다. 만질 수는 없어 슬펐다. 집에 혼자였던 날 몰래 이것저것 만지다 그만 소리가 끝까지 커져 버렸는데, 끌 줄을 몰라 그 저녁 온 동네가 난리였다. 턴테이블 바늘을 부러뜨린 건 끝까지 잡아뗐다. 소리는 과연 웅장했다. 아버지 즐겨 듣던 가사 없는 뽕짝 리듬이 가슴을 쳤다. 이글스며 퀸,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 라디오 녹음하느라 별이 빛나는 밤이 깊은 줄을 몰랐다. 여섯 식구 북적이던 비좁은 집에서 커다란 오디오는 언제나 명당자리 임자였다. 지금도 시골집 거실 한편에서 그렇다. 버릴 줄을 모르신다. 동네 작은 아파트 경비일 하는 아버지는 재활용품 수거장에서 이것저것 낡은 것들을 주워다 고쳐 쓰신다. 손녀딸 자전거도 크기별로 마련해 두셨다. 전화드렸더니 병원에 가셨단다. 귀가 윙 하고 울리는 어지러움을 호소하셨단다. 늙어서 하나둘 망가지는 거지, 어머니는 별스럽지 않다는 듯 보탰다. 아버지 목소리도 한때 우렁찼다. 젓가락 장단에 맞춰 부르시던 노래가 근사했던 기억이 난다. 들어 본 지는 오래다. 낡은 스피커 두 통이 쓰레기더미 옆에서 저물어 가는 햇볕을 쬐고 있다. 벌써 노안인가, 안 그래도 침침한 눈이 더 흐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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