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 많은 선택들이 있다. 그중에는 특히 삶의 위치와 조건을 바꾸는 결정적인 몇 안 되는 순간들도 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는 다르겠지만, 인생을 조금 살아 본 사람 입장에서, 아마도 직업 선택과 배우자 선택이라는 두 가지는 누군가의 일생을 결정하는 데 가장 큰 무게를 차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는다. 이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 대부분이 공감할 거 같다.

두 가지 이벤트가 사회 구성원들에게 그렇게 중차대한 거사임에도, 정작 누가 직업을 갖거나 취업을 할 때도 그렇고, 배우자를 맞이할 때도 그렇고, 사회나 국가가 그것을 안내해 주고 교육해 주는 시스템은 우리에게 사실상 부재하다. 한 개인의 일생에 끼치는 영향이 막대하고, 사회질서 유지나 재생산과 관련해서도 엄청난 선택들임에도, 그것에 임하는 개인이 갖춰야 할 새로운 책임과 의무에 대해 사회가 아무런 공식적 안내나 가이드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게 과연 당연한 걸까.

얼마 전 한 연구기관에서 수행하는 연구작업을 자문하는 자리에 간 적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 한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청년인턴’이라고 하는 젊은 집단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수행해 이 제도의 운영방식을 개선하려는 연구였다.

주지하듯이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청년고용은 악화돼 갔음에도 정작 정부가 취한 정책수단이라곤 대충 기간제 일자리 ‘맛보기’ 기회를 늘리는 것 위주에 그쳤다. 과도한 비판일까.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사업이 공공기관 청년인턴이었고, 언제부터인가 민간부문도 대학생들을 스펙 쌓기 경쟁으로 내몰면서 찔끔찔끔 인턴들을 받아들여 왔다.

원론적으로 인턴(intern)은 일정하게 직업과 관련한 이론 및 실무교육을 받고 어느 정도의 역량에 도달한 이들이 실습이나 수련을 통해 그것을 적용하면서 해당 직업 전문가로 태어나기 위한 준비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알다시피 우리 사회 현실에서 그 의미는 원론처럼 든든하고 화려하지 않다.

그동안 청년들을 인턴으로 받아들이는 기관이나 기업들도 그렇고, 청년들 스스로도 그렇고 이 기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했나. 혹시 현실에서 인턴은 마치 시베리아처럼 얼어붙은 지금 같은 노동시장에 잠시나마 이글루를 만들어 불 지피고 손 녹이는 시간 정도로 간주하지는 않았나.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나.

정부가 헌법을 유린하던 시절, 국민은 헌법상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도 주창하지도 못했다. 그 가장 큰 희생자는 뭐니 뭐니 해도 청년들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상황은 그사이 계속해서 악화돼 왔다.

문재인 정부가 이러한 흐름의 전환을 도모한단다. 그러면서 눈에 띄는 것이 ‘노동존중 사회’라는 슬로건이다. 그 구체적인 의미야 정책 당국자들이 정의 내리고 추진해 가겠지만, 반드시 빠뜨리지 말고 인식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현재의 위기 상태, 절망 상태로 청년들을 내몬 것은 어디까지나 기성세대들이었지 청년들 스스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녕 노동존중을 지향하는 사회라면 ‘학교에서 일터로(school-to-work)’의 중차대한 일생의 전환기에 놓여 있는 청년들을 지금처럼 방치해서는 안 된다. 적절한 일터로의 진입은 그들의 헌법상 행복추구권의 일부이며, 국가는 그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할 의무를 갖는다.

이제 노동존중 사회에서 인턴십 과정은 그렇지 못했던 사회에서의 그것과 달라야 한다. 월급이 어떻게 구성되고 책정되며 향후 어떻게 변해 가는지에 대한 인지기회 제공은 기본이다. 고용계약의 의미, 우리 사회 일터 밖에 존재하는 다양한 고용서비스와 사회보험적인 안전망에 대해 인지하도록 알려 줘야 한다. 더 나아가 당당한 노동자로서 스스로의 권리를 인지할 수 있도록 하고, 직장생활의 보편적인 규범과 매너 교육도 아무런 조건 없이 충실히 받도록 해야 한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