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제징용 피해자 김한수 선생과 부인 박기순씨가 강제징용 노동자상 앞에 앉아 있다. 배혜정 기자

갈비뼈가 드러난 깡마른 몸. 오른손엔 곡괭이를 들고 왼손으론 작열하는 태양을 피하듯 얼굴을 가린다. 오른쪽 어깨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운성·김서경 작가가 제작한 '강제징용 노동자상'이다.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 김한수(100) 할아버지가 키보다 큰 동상을 어루만지고 껴안았다. 젊은 날 자신의 모습과 마주한 김 할아버지는 회한 가득한 눈물을 흘렸다.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과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은 노동자상 앞에 국화 한 송이씩을 놓고 머리를 숙인 뒤 두 손을 맞잡았다. 300여명의 양대 노총 통일선봉대원들이 "너무 늦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함께하겠습니다"를 외쳤다.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 잊지 않아야"

일제강점기 일본·사할린·남양 군도·쿠릴열도 등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하다 죽은 조선인들을 기리는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지난 12일 용산역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용산역은 일제가 강제징용한 노동자들을 집결시킨 장소로, 소위 '인간 창고'로 불렸던 곳이다. 양대 노총이 주축이 된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 추진위원회는 이날 오후 용산역광장에서 제막식을 열고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이곳 용산역에 강제로 끌려와 일본은 물론 사할린·남양 군도·쿠릴열도 등의 광산·농장·군수공장·토목공사 현장에 끌려가 착취당했다"며 "그들이 마지막으로 고향 땅을 떠나던 이곳 용산역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건립해 우리의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자 한다"고 밝혔다.

김주영 위원장은 "역사를 잊은 자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처럼, 갈수록 희미해져 가는 역사를 우리 손으로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라며 "전범국 일제의 실체를 널리 알려 이제라도 일본 정부의 공식사죄를 받아 내고, 다시는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양대 노총은 지난해 일본 단바망간기념관에 첫 번째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건립한 데 이어 당초 올해 3월1일 용산역광장에 노동자상을 세우려 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건립부지 제공을 거부하면서 무산됐다. 정권이 바뀌면 사정이 나아지리라 기대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아직 부지 허가에 대한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날 제막식도 사실상 추진위측이 강행한 것이다.

최종진 위원장 직무대행은 "문재인 정부는 국가부지인 용산역광장에 노동자상을 건립하는 것에 적극 협조하지 않고 있다"며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작은 실천에 함께해 달라"고 주문했다.

추진위는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강제동원조사법)에 따른 협조를 정부에 요구했다. 강제동원조사법 37조(피해자 관련 재단지원 등)는 정부가 대일항쟁기 강제동원으로 사망한 자를 추도하고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평화와 인권을 신장하기 위한 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되는 재단을 지원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추진위 관계자는 "강제동원조사법상 지원이 가능한 만큼 행정안전부와 협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전 세계에 세워 일제강점기 인권을 유린당한 노동자들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게 해야 한다"며 "가해자인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노동자상이) 용산역광장에 제대로 건립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일본 강제징용 피해자 김한수(100) 선생이 지난 12일 오후 서울 용산역광장에 세워진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어루만지고 있다. <한국노총>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과 최종진 민주노총 위원장 직무대행이 헌화하고 있다. <한국노총>


강제징용 피해자, 한일 양국에 책임 있는 자세 촉구

이날 부인 박기순씨와 함께 제막식을 찾은 김한수 할아버지는 1944년 나가사키 미쓰비시 조선소로 끌려가 노역을 했다. 항공모함 제작에 동원돼 인간 이하의 삶을 살다 이듬해 8월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원폭피해를 당했다. 그는 "일본은 왜 젊은이들을 끌고 가서 고생을 시키고도 사죄 한 번 하지 않는 것인지, 대한민국 정부는 왜 책임을 묻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한일 양국에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했다.

지난해 일본에 첫 번째 노동자상을 세운 김동만 한국노총 상임지도위원은 "우리나라에 노조가 생기고 가장 잘한 일이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운 것"이라며 "선배 노동자들의 아픈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양대 노총이 평양·사할린 등지에 세 번째, 네 번째 노동자상을 계속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오후 인천 부평공원에도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세워졌다. 부평공원은 일제강점기 군수물자 보급공장인 육군 조병창 터를 바라보는 자리에 있다. 추진위는 올해 10월 경남과 제주에 이어 내년에는 평양에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건립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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