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노조 간부 또는 정부 관계자와 대화하다 보면 어리둥절할 때가 있다. 노동시간단축을 염두에 둔다면 유연근무제 도입은 필수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여기에 시간선택제·시차 출퇴근제·집중근무제·보상휴가제(근로시간계좌제) 등이 포함된다. 연간 노동시간이 1천800시간에 도달한 나라에서 유연근무제는 흔하다. 우리는 연간 노동시간이 2천200시간에서 2천300시간이나 된다. 그럼에도 노조간부와 정부 관계자 모두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왜 그럴까.

유연근무제가 사용자 마음대로 노동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제도라는 비판도 있지만 이런 비판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되레 다음과 같은 조건이 도입의 걸림돌이다. 빈번한 초과노동과 연차휴가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장시간 노동 관행이다. 노동시간단축과 병행하지 않은 유연근무제는 의미가 없거나 퇴색한다. 노동자 스스로 노동시간을 조정하거나 선택할 권리도 봉쇄된다.

역대 정부는 이 문제 해결에 역점을 뒀다. 일·가정 양립과 일자리 창출이 정책 목표였다. 이명박ㆍ박근혜 정부는 전자보다 후자에 쏠렸다. 장시간 업무 관행은 그대로 둔 채 유연근무제만 도입하려 했다. 박근혜 정부는 공무원 사회에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적용했다. 일·가정 양립을 위해 전일제 공무원은 시간제를 선택할 수 있고, 다시 원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바로 ‘전환형 시간선택제 공무원’이다.

전적으로 시간제로 일할 수 있는 공무원도 채용했다. 이른바 ‘채용형 시간선택제 공무원’이다. 박근혜 정부는 “능력과 근무의욕은 있는데 종일 근무할 여건이 안 되는 인재들에게 일자리를 주겠다”고 발표했다. 그럴듯한 ‘말풍선’이었다. 전국통합공무원노조 시간선택제본부는 지난 8일 국회에서 ‘시간선택제 공무원 제도개선 토론회’를 열어 이같은 실상을 폭로했다.

"최근 감사원 관계자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왜 초과근로를 하냐고 따지는 거예요. 말문이 막히더라고요. 수당도 제대로 못 받는 시간제인데 초과근로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칼퇴근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에요. 전담업무를 주지 않고 순환하는 데다 신규사업 부서에도 배치돼요. 새 업무에 적응하다 보면 칼퇴근은 어림도 없죠. 최근에는 파업을 하는 이들(직업상담원)의 뒷감당을 하느라 초과근로를 하고 있습니다. 정부가 내건 시간제 적합직무 개발은 그야말로 허풍이었어요."(고용노동부 서울고용센터 채용형 시간선택제 여성 공무원 A씨)

"겸직허용 조항이 있어요. 이전 정부가 시간선택제 공무원제도를 도입할 때 만든 겁니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시간선택제 일자리 기회를 주겠다는 취지예요. 이전에 IT(정보통신) 업체에서 연 4천만원의 연봉을 받았죠. 자격증이 아깝더라고요. 결국 겸직허용 조항에 이끌려 시간선택제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어요. 시간선택제 공무원을 하면서 기껏 편의점 알바를 겸직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종전 연봉이 반토막 나고 전일제 공무원에 비해 차별까지 받으니 설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경찰청 채용형 시간제선택제 남성 공무원 B씨)

시간제 공무원은 전환형·채용형·임기제로 구분된다. 전환형 시간제 공무원은 종전과 동일한 대우를 받지만 채용형·임기제는 다르다. 채용형·임기제는 공무원연금 적용에서 배제되고, 임금과 복지 혜택에서 차별받는다. 전일제와 비교해 시간비례 임금을 적용받는데 일부 수당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단시간 노동자 보호 차원에서 적용하던 시간비례 원칙이 되레 차별을 조장한다. 게다가 채용형·임기제의 경우 전일제 공무원으로 전환이 아예 봉쇄돼 있다. 시간선택제 공무원제도가 또 하나의 차별적인 일자리로 전락한 셈이다.

그렇다면 종전 공무원들은 이 제도에 매력을 느낄까. 대다수 공무원들은 임금감소뿐 아니라 동료의 업무부담 증가를 우려해 전환형 시간선택제를 꺼린다.

꼬인 문제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이명박 정부는 시간제 일자리를 도입하면서 공공부문 정원관리 방식을 ‘인원’ 기준에서 ‘근로시간’ 기준으로 바꿨다. 이명박 정부는 이 규정을 개정하면서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했다. 장시간 업무 관행은 외면했다. 그러다 보니 질 낮은 시간제 일자리만 양산했다. 박근혜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해당 규정에 대한 해석을 달리해야 한다. 공직사회 장시간 업무 관행 개선과 노동자의 시간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 공직사회부터 초과근로를 하지 않고, 연차휴가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풍토를 조성하면 어떨까. 이러한 노동시간단축을 전제로 시간선택제 같은 유연근무제를 병행하는 것이다. 시간선택제 또한 노동자의 노동시간 선택권 보장이라는 취지로 접근해야 한다. 채용형은 폐지하되 전환형으로 통합 운영해 말 그대로 '전환형 시간선택제'를 활성화하자. 이런 방향으로 정책을 설계해야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정책 목표에 첫걸음을 뗄 수 있다. 이전 정부의 실기를 바로잡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시급한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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