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진 금융노조 수출입은행지부 위원장

세계경제는 지금 병에 걸려 있다. 그것도 2008년 미국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번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가까이 근본적으로 치유된 적이 없는 중병이다. 매년 초가 되면 으레 등장하던, 올해는 나아질 것이라는 신년기사가 예측이 아닌 희망사항이 된 지 오래다. 그나마 최근에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조차 드문 것이 현실이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한 세기 전 지금과 같은 장기간의 불황을 경험한 적이 있다. 1929년 역시 미국에서 시작해 세계로 퍼진 ‘대공황’이다. 자본주의 최초의 불황이기도 했다. 공장과 가게에 재고는 가득한데 정작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고 호주머니에는 물건 살 돈이 없는 사상 초유의 ‘풍요 속의 빈곤’ 사태에 당시 주류 경제학자들은 전전긍긍할 뿐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영국 태생의 경제학자 케인스가 혜성같이 나타난 게 그때다. 수요부족이 문제의 근원임을 지적한 그는 정부지출로 경기회복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뉴딜’로 명명된 그의 재정정책 덕분에 미국은 불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독일 같은 나라는-역시 수요확대라는 측면에서 경제적으로는 동일한 효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전쟁이라는 잘못된 방법을 통해 불황탈출을 시도했고, 그 결과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명피해를 남긴 2차 세계대전이었다. 여담이지만, 모든 전쟁은 돈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공급과잉과 수요부족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곳으로 어디가 꼽힐지, 매우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백약이 무효다. 재정정책도, 통화정책도 경기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실패했다. 치유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중병의 원인은 그러나 알고 보면 단순하다. 사람이 병에 걸리는 이유가 ‘몸의 균형’이 깨졌기 때문인 것처럼 경제가 병에 걸리는 이유는 ‘시스템 균형’이 깨졌기 때문이다.

경제라는 시스템은 정부·가계·기업의 세 주체로 이뤄진다. 가계는 노동을 제공하고, 기업의 생산물을 소비한다. 기업은 제공받은 노동과 자본을 결합해 재화를 생산하고 이윤을 축적한다. 이처럼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상생관계 속에서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말처럼 어느 한쪽이 미약해지면 다른 한쪽도 위태로워지기에 전체 시스템의 안정적 발전을 위한 균형추로서 정부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제는 ‘돈이 돈을 낳는 경제체계’로 정의되는 현재 자본주의에서는 기업, 다시 말해 자본으로 힘이 쏠리는 현상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소위 복리 효과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자본의 속성상 시간이 갈수록 노동 제공자인 가계 대비 기업에 대한 힘의 집중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국·영국 등 강대국 정부의 비호 아래 노동을 소외시키고 세계경제를 자본의 놀이터로 전락시키며 ‘1% 대 99%’라는 극단적 불균형을 초래한 신자유주의의 득세는 불균형을 바로잡기는커녕 더욱 가속시켰다.

그러므로 정부가 시스템의 균형 복원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역사의 경험에서 이 평범한 상식을 깨달은 서구 선진국이 개별 노동자의 권리, 집단 노동조합의 권한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정부 정책을 펼친 배경 또한 바로 이것이다. 노동자라는 사회적 약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공동체의 미덕이지만, 노동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가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인종·성별·빈부와 무관하게 인권이 존중받아야 하듯, 월급을 얼마 받느냐에 따라 노동자 권리에 차등을 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노동존중 세상을 여는 것은 노동만을 이롭게 하는 부문의 최적화가 아니라 경제 생태계의 균형을 찾아 다시 건강하게 만드는 전체의 최적화를 위한 작업이다. 노동현장에서 함께 웃고 울며 오랜 세월을 보냈던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의 큰 틀에서 노동존중 의미를 녹여낸다면, 경제정책에서 진정한 노동의 가치를 담아낸다면, 대한민국이 재도약할 수 있는 시간은 분명 우리 편이다. 온 국민의 염원을 담아 출범 100일을 앞두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과 새 정부의 성공을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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