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호 한국노총 교육선전본부 국장

“생존수영?”

“네. 바닷가나 강가에서 물에 빠져 위험할 때 자신을 도울 수 있는 거예요.”

학교에서 수영을 배웠다는 아이는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으로 그날 배운 생존수영을 설명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초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생존수영 교육이 의무화됐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학생수가 적어 전교생이 생존수영을 배운다.

생존수영의 가장 기본은 수면 위로 얼굴을 내놓고 양팔을 펴서 무게중심을 잡는 것이다. 헤엄을 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구조될 때까지 그 자리에 둥둥 떠서 버텨야 한다. 아이는 수영을 즐기기 위해 일단 생존을 배운다.

생존한다는 것. 살아남는 것은 이 사회에서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올해 7월까지 우정노동자 12명이 과로사·돌연사 등으로 세상을 등졌다. 지난 5년까지 시간을 넓히면 무려 70명이 넘는다. 집배원들의 하루 평균 11시간, 1년 2천869시간의 노동은 인간의 삶이 아니다. 지난달 서울광장에서 열린 우정노조 집회에서 나온 “어렸을 때는 아빠처럼 집배원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아이의 말에 집배원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국민 안전과 관련한 운수업종의 장시간 노동도 참혹하긴 매한가지다. 마땅히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노사합의로 책임을 미뤄 놓은 채 1961년 이후 개정하지 않은 근로기준법 59조는 이제야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그마저도 ‘노선버스’만 제외하겠다고 하니 택시노동자·항공노동자, 영화·방송제작 노동자 등은 여전히 장시간 노동에서 자유롭지가 않다. 이마저도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이뿐인가. 지난 두 달 사이 두 명의 마필관리사가 죽음으로 경마장의 다단계 착취구조와 장시간 노동을 폭로했다. 수조원의 이익을 낸 공기업 마사회는 이들의 노동환경이나 처우 문제에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이처럼 지금 많은 노동자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누리기보다는 최악의 환경 속에서 버티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생존권은 ‘살아 있을 권리’다. 살아남은 이유가 운이 좋아서라든가, 강한 자였기 때문이라면 슬픔과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생존권을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국가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라고 이야기한다. 이를 뒤집으면 국가의 의무이기도 하다.

국민의 존엄과 가치·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지켜 주며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와 함께 사회·경제적 방법으로 노동자의 고용증진(안정)과 적정임금 보장을 책임질 의무, 는 굳이 헌법을 들먹이지 않아도 당연히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의무다.

“그런데 물에 떠 있는데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생존수영을 설명하며 의기양양해하는 아이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지자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한다.

“아빠가 올 거잖아요. 안 올 거예요?”

당연히 가지. 부모란, 또는 국가란 모름지기 그리해야지. 자식의,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지.

한국노총 교육선전본부 국장 (labor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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