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20세기 초·중반은 국가와 노동이 개별 자본에게 노동에 대한 책임을 부과했던 시기다. 여러 나라에서 경제민주주의·복지국가·수정자본주의 등의 이름으로 그와 관련한 다양한 조치들이 이뤄졌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이른바 신자유주의 고용패러다임이 이전까지 이뤄졌던 자본의 노동에 대한 책임을 탈각시켜 갔다.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경제의 디지털 전환’의 정도·범위와 무관하게, 자본은 이미 현실의 노동시장 질서 재편을 추구하면서 고용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최소화하려는 전략을 관철시켜 왔던 것이다.

많은 나라 정부들은 20세기 말부터 최근까지 자본의 탈책임화를 향한 제도개혁을 단행하면서, 글로벌 시대가 초래한 무한경쟁에 적응한다는 명목하에 표피적으로 비용(인건비) 감소와 노동운용상 효율성 증진 효과를 강조했다. 해고규제를 약화하는 것(정리해고나 일반해고 도입)이나 고용관계에 기한을 두는 것(기간제 고용), 그리고 간접고용을 활성화해 최종적인 노동 사용자의 노동자에 대한 법적 책임을 면제시켜 주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한 '자본의 노동에 대한 탈책임화 전략'은 종래 고용에 대한 자본의 책임 강제를 매개로 해서 시스템화되고 발전해 온 ‘노동의 사회적 시민권’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고, 결과적으로 한 사회의 불평등 증가와 사회통합 파괴라는 심각한 문제를 동반했다.

해당 전략은 모든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동일한 시기에 전일적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 한 사회 내에서도 노동의 저항이 약한 곳이나 탈책임화를 통한 이윤증진 기회가 큰 곳을 중심으로 점진적이고 차별적으로 진행됐다. 노동시장의 이중구조화 내지 양극화는 그런 식으로 확산됐다.

탈책임화 전략의 관철 내지 양극화 추세는 보편적이었지만, 그 정도와 시기는 나라마다 상이했다. 기존에 형성돼 있던 제도의 두께, 그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의 현재적 깊이, 개혁을 향한 노동정치에서의 사회세력 간 역학관계가 달랐기 때문이다.

일종의 ‘신자유주의 상흔’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노동시장에서의 사회통합성 파괴는 2010년대에 접어들어 비로소 치유의 기운을 맞이한다. 길게 보아 최근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문제를 지양하고 극복하려는 정치적 노력들이 있었다. 독일에서는 2000년대 초 하르츠 개혁 때문에 취약노동층이 증가하자 이에 대한 처방으로 3년 전부터 법정 최저임금 도입으로 맞서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작금에 추진하고 있는 여러 시도들도 그간 한국에서 전개돼 온 '자본의 노동에 대한 탈책임화 전략'의 전폭적인 수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의 전폭적 인상, 취약노동자들의 이해대변 기제 확대, 노사상생의 일자리 창출 전략 추구 등은 한국이 뒤늦게 '노동 재포용화' 정책기조를 택한 증거다.

일단 정권 초기 상황에서 개혁 드라이브는 상당히 강력하고 인상적이다. 어처구니없는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반사이익 효과일 수도 있겠지만, 국민의 강력한 지지가 그런 드라이브의 큰 동력이라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현실의 취약노동자들이나 미취업자들의 고통이 극에 달한 것이 이러한 개혁의 최대 정당성 자원이다.

일단 지금 공식적으로 31만명을 대상으로 추진하고 있는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시도는 그 첫 단추에 해당한다. 의욕만 앞세우지 말고 전환 과정에 충분하고 효과적인 행정자원을 투입하는 것, 그리고 전환 절차에서 보다 면밀하고 형평성을 갖춘 논리적 원칙을 잘 갖추며 깊고 길게 호흡하며 진행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는 향후 이러한 개혁을 민간부문으로 효과적으로 확산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궁극에 한국 노동시장의 지속가능한 질서 구축에 결정적인 함의를 지닐 것이기에 한 발 한 발 더 큰 정성이 필요하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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