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민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국제노동기구는 좋은 일자리의 기준을 제안하며, 그중 하나로 좋은 노동시간을 들었다. 좋은 노동시간의 첫 번째 기준은 ‘건강한 노동시간’이다. 어떤 연구자는 개인·가족·조직과 공중의 안전과 건강에 나쁜 영향을 주기 시작하는 노동시간을 넘어선 노동을 과로라고 정의했다. 이런 나쁜 영향에는 노동자 개인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이나 가족 생활에 미치는 영향뿐 아니라 지역사회에 미치는 악영향도 포함된다. 장시간 노동이 사고나 작업 중 실수로 이어져 지역사회에 질병이나 손상 비용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하는 장시간 노동이라 해도 나쁜 영향이 사라지지 않는다. 노동시간 결정을 사업장마다 자율에 맡길 수 없고, 법적 규제가 필요한 이유다. 장시간 노동뿐 아니라 교대근무·휴일근무 등 개인과 회사, 가족과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근무 일정에도 규제가 필요하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버스노동자 사고를 계기로, 노동시간 특례업종(근로기준법 59조)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다행이다. 이제 전 국민이 분명히 알게 됐다. 우리가 장시간 노동을 하는 것은 단순히 조직문화의 문제도, 근면한 국민성 때문도 아니다. 무제한 노동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가 번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정치권의 답은 답답하기만 하다. 연장근로를 제한하지 않아도 되는 특례업종에서 ‘노선버스’만 제외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며칠 전 국회에서 열린 ‘근로기준법 59조 폐기를 위한 현장노동자 증언대회’에 나선 노동자만 해도 2박3일씩 일한다는 항공 노동자, 식사 시간도 없이 하루 12시간씩 한 달에 26일 야간에 일하는 택시노동자, 하루 평균 19시간 일한다는 방송제작 노동자 등 다양했다. 버스사고는 ‘버스업종’만의 문제가 아니다. 근로기준법 59조가 장시간 노동의 덫이 돼 노동자와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는 상징일 뿐이다.

정치권과 경영계는 문제가 된 59조마저 폐기 대신 일부 업종을 남겨 두려 하지만, 기가 막히는 조항이 59조만은 아니다. 근로기준법 63조는 아예 ‘근로시간, 휴게와 휴일에 관한 규정’을 모두 적용하지 않는 업종을 정해 두고 있다. 농축산업·양잠·수산사업, 감시 또는 단속적으로 근무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한 달에 1~2일 쉬고 하루 10시간, 매일 1만5천개의 깻잎을 따는 이주노동자들의 사연에는 고용허가제와 더불어 농축산업에 대한 노동시간 규제가 전혀 없는 사정이 배경으로 작동한다. 2013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노동 실태에 따르면 대부분 한 달에 이틀 쉬는 이 노동자들의 월평균 노동시간은 283시간이다. 임금과 월 근무시간을 토대로 최저임금을 계산해 보면 농축산업 이주노동자들의 71.1%가 최저임금에 못 미치는 월급을 받고 있었다.

택시노동자들이 ‘버스는 우리보다 낫다’고 푸념하게 만드는 근로기준법 58조도 있다. 58조는 근로시간 계산의 특례조항이다. 노동자가 사업장 밖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아 노동시간을 산정하기 어려운 경우 노사 간 합의에 따라 소정근로시간을 정해 그 시간만큼 일한 것으로 본다는 조항이다. 택시노동자들은 이 조항 탓에 하루 10시간 일하고도 1.5~7.3시간만을 노동시간으로 인정받아 기본급을 받는다. 이미 세상이 바뀌어 택시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측정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해졌음에도 이 같은 말도 안 되는 규정이 통용된다.

59조마저 일부 살려 두려는 꼼수를 부릴 때가 아니다. 59조뿐만 아니라 63조·58조 등 근로기준법상 노동시간 규제 완화 조항을 대대적으로 손봐야 한다. 아예 근로기준법에서 노동시간을 다루는 틀을 바꿔야 한다. 지금처럼 무제한적인 장시간 노동이 묵인되는 체제에서 하루 노동시간, 주당 노동시간, 연간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체제로의 변화가 필요하다. 이미 연간 노동시간이 2천시간 미만인 여러 나라에서 시행하고 있는 정책이다.

그런데 끔찍한 사고로 사회적 공감을 얻어 낸 근로기준법 59조마저 전면 폐기가 아니라 ‘노선버스 업종’만 특례 제외라니! 선거 때마다 너나없이 들먹이던 노동시간단축 의지는 어디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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