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특히 결사의 자유 협약(87호)과 단체교섭권 협약(98호)에 관해 우리 사회가 가진 가장 큰 오해는 이들 협약이 사실상 전교조와 공무원노조를 위한 것 아니냐는 인식이다. 지난 정권에서 해고자를 임원과 조합원으로 뒀다는 이유로 ‘법외’ 노조가 돼 노동조합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한 두 노조다. 조합원의 범위는 노조 규약으로 결정하는 것인데, 이를 국가가 법률과 행정 조치로 옥좼다. 기본협약의 취지에 맞게 법 개정과 제도개선이 이뤄진다면,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토대인 결사의 자유를 위협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시정될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ILO 기본협약 비준은 조직 노동의 일부에 불과한 공무원·교사 노조만이 아닌 90% 미조직 노동자를 위한 것이다. 2천만 노동자 중 1천800만을 차지하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근로감독과 사회보장 등 국가가 주도하는 보호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미조직 노동자 스스로 결사해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행동하지 않는 한 문제 해결 단초를 찾기 어렵다. 이익은 권리에 비례하며, 권리는 결사를 통한 집단적 행동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으로 모여(collectively organise), 집단으로 행동하고(collectively act), 집단으로 교섭하는(collectively bargain) 집단적 권리가 보장되지 못하는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90% 미조직 문제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이런 점에서 ILO 기본협약 비준 문제는 교사·공무원 노조의 ‘법내화(法內化)’라는 협소한 울타리를 넘어 90% 미조직 노동자들의 노동 3권 보장이라는 큰 틀에서 제기되고 그에 걸맞은 전략 수립과 전술 마련으로 이어져야 한다.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 보장은 공공부문의 핵심으로 사회적 기준에서 고용보장과 연금 등에서 이중삼중의 보호를 받는 공무원과 교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별다른 사회적 보호 없이 자본주의 노동시장에 내동댕이쳐진 비정규직과 영세사업장 노동자를 위한 것이다.

두 번째 오해는 관련 법·제도를 먼저 고쳐야 ILO 협약을 비준할 수 있다는 ‘선입법-후비준’론이다. 이 주장의 궁색함은 1991년 ILO 가입 이후 사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무엇을 했느냐는 문제 제기와 맞닿아 있다. 특히 국제노동기준 준수를 약속한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과 2007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타결 이후 보여 준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 방기는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한국 정부의 ILO 가입 이후 노동법은 기본협약에 맞게 개선되지 못하고, 오히려 협약의 취지를 거스르며 개악돼 왔다. 이는 법률의 제정과 집행·판결 전반에서 민주주의의 전제인 ‘법의 지배(the rule of law)’가 무력화되고 독재권력의 수단인 ‘법을 이용한 지배(the rule by law)’가 강화돼 온 현실과 맥을 같이 한다. ‘법의 지배’와 ‘법을 이용한 지배’의 차이점은 법 앞의 평등이다. 법률은 제정 단계부터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만들어졌고, 집행 단계에서 노동자를 배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했으며, 판결 단계에서 자본가의 계급적 이익을 보장하도록 설계됐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의 수많은 법률과 제도는 민주주의의 첫걸음인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을 침해하게 됐으며, 이는 ILO 핵심기준에 대한 지속적이고 일관된 비준 거부로 이어졌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등장과 탄핵으로 이어진 정치 상황은 ‘법의 지배’가 무력화된 일례에 불과하다. 촛불항쟁으로 새 정부가 등장했지만, ‘법의 지배’ 실현은 아직도 요원하며 우리 사회 곳곳에 ‘법을 이용한 지배’가 자리 잡고 있다. 국제적 상식에 크게 못 미치는 노동권에 대한 제한, 그리고 그 개선을 발목 잡기 위한 ‘선입법-후비준’론이 대표적이다.

입법-집행-판결의 전 과정에서 ‘법의 지배’가 사실상 무력화돼 있는 법률적 후진국인 현 상황에서 ‘선입법-후비준’을 주장하는 것은 비준은 물론 입법도 하지 말자는 이야기와 같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적폐의 연장인 것이다.

비준과 관련해 ILO헌장에서 해당 국가에 특별히 요구하는 사항은 없다. “각국은 자체의 헌법 조항이나 관행”에 따르면 되고, 대신 해당국 정부는 비준서(the instrument of ratification)를 ILO 총장에게 보내야 한다. 비준서는 “(a) 비준할 협약을 분명히 명시해야 하고 (b) 국가수반·수상·외교장관 혹은 노동장관 등 국가를 관장하는 권한을 가진 개인이 서명한 (팩스나 복사가 아닌 서면으로 된) 원본 문서여야 하며 (c) 더 좋기로는 국가가 관련 협약을 준수한다는 정부의 의사와 그 협약의 조항을 이행한다는 정부의 약속을 분명히 전하면” 된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혹은 외교부 장관이나 노동부 장관이 정부의 의지를 담은 비준서를 ILO 총장에게 제출함으로써 국제법적으로 비준 문제는 해결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국내법적 과제와 절차가 남는데, 비준 이후 국제기준에 위배되는 관련법을 개정함으로써 국내법적 절차는 마무리된다 하겠다. 필요하다면 비준 이후의 입법 과제는 ILO 전문가그룹과의 협력을 통해 마무리할 수 있다. ‘선비준-후입법’의 사례는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의 노동권 후진국가들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이들 못지않은 노동권 후진국인 우리나라에도 ‘선비준-후입법’ 방식은 사반세기 넘게 존재해 온 장애물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90%의 집단적 결사·교섭·행동을 가능하게 할 계기를 빨리 마련해야 한다. 그 정치·사회·법률적 추진력은 ILO 기본협약 비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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