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이른바 한국의 ‘87년 노동체제’의 시작은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목소리(voices)가 조직화로 이어지고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산업질서와 노동조건의 공동형성자로 인식해 나가면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87년 노동체제는 지금 우리가 보다시피 노조 조직률 10%에, 극심하게 양극화되고 계층화된 노동시장의 상태로 귀결되고 말았다.

한국에서 노조 조직이 미진한 것에는 여전히 노동조합의 결성과 활동에 제도적 제약이 가해지고 있는 것이 적지 않게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적 요인이 결정적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제도는 노동조합의 행위공간을 일정하게 열어 두고 있지만, 노동조합이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내지 못하면서 조직 확대에 실패한 측면이 더 크다. 환경적 요인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주체적인 한계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노동조합의 편중화와 확대 실패는 기업규모·고용형태, 기업 간 관계의 구조적 특성과 맞물려서 노동시장의 넓은 영역을 이해대변 사각지대로 방치하고 있고, 궁극에는 노동자 간 격차 심화를 초래하고 있다. 심하게 말해 노동조합과 노사관계가 노동불평등 확산의 해결자가 아니라 원인제공자로 기능하는 형국인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노동시장에서의 ‘새로운 포용’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현 정부나 노동계 모두 미조직·취약 노동자들의 이해대변 조건을 어떻게 증진시킬 것인가는 중요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당장은 정부의 이니셔티브를 통해 여러 정책이 수립되고 발현되려 하고 있지만, 보다 성숙하고 지속가능한 포용의 실현을 위해서는 노동이해대변 사각지대가 해소되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권익 주장을 조직적으로 펴 나가면서 그것이 사회의 합리적 발전에 복무해 가도록 ‘현실의 밭’ 자체를 새롭게 갈아 가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의식과 흐름 속에서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노동이해대변을 노동조합에만 맡기지 말고 새로운 이해대변체를 구축해 보완적으로 작동하도록 하자는 문제의식이 발흥하고 있다.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체가 노동자들의 자발성(voluntarism)에 주로 기댄다면, 새로운 이해대변체들은 그러한 자발성이 작동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법률적 강제를 통해 노동자 권익증진이 이뤄지도록 하자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기업 내에서는 서구에서 'Works Councils'로 통칭되는 종업원평의회를 구축하고 근로자이사제 등의 기제를 통해 노동의 경영참여를 심화시키자는 의견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대표적인 의견은 기업 외부에서 미조직·취약 노동자들의 이해대변을 위해 노동회의소(Workers Chambers)를 만들어 보자는 의견이다.

필자는 이러한 의견들 모두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고 그것이 실제로 목표한 바, 산업민주주의 심화와 노동이해대변 효과성 증진, 그리고 그것을 통해 노동시장의 격차해소와 균형증진이 이뤄지는 데 기여하도록 제대로 설계해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조급하지 말아야 하고 여타 제도적 얼개들과의 정합성 문제까지도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보완적 노동이해대변체에 대한 상상에는 두 가지 전제조건이 필수적이다. 첫째, 우리 사회는 여전히 노동조합의 주체적 한계 못지않게 제도·환경적 제약이 작동하고 있고, 그러한 제약은 노동조합의 주체적 한계를 만들어 내는 것에도 영향이 큰 상황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인지해야 한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주체적 한계를 쉽게 결론짓기 이전에, 일단 그러한 제도적 제약들에 대한 해소방안을 먼저 강구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국제노동기구(ILO) 결사의 자유협약 비준과 같은 조치는 그것을 위해 결정적인 촉매제로 작용할 수 있다.

둘째, 아무리 새롭고 보완적인 이해대변체를 제도화힌다고 해도, 그것이 명목적 제도화를 넘어 실질적 제도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스스로 자신들의 주체적 한계에 대한 극복 노력을 적극 펼치는 것이 필수적이다. 지금처럼 조직노동의 미조직 노동에 대한 무관심이 팽배하다면, 보완적 기제들의 도입은 노노갈등을 부추기거나 노동조합의 고립 심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

종업원평의회든 노동회의소든 그것이 작동할 수 있는 문화적·인식적 기반은 노동 스스로 폭넓은 연대를 지향하고, 자치를 도모하려는 의지가 출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토대가 됐을 때 자본과의 대등한 사회적 파트너십을 토대로 한 민주적인 집단적 노사관계의 비전도, 새로운 제도적 기제들과의 조화를 통한 균형 잡히고 지속가능한 노동시장 질서 수립도 가능하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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