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호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6일 26년 전 유서 대필 누명을 썼던 강기훈씨에게 정부와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문서분석실장이 6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여러 언론이 이를 받아썼다.

1991년 4월 명지대 학생 사망사건으로 시작돼 뜨거웠던 강경대 정국은 검찰의 이 황당한 수사로 삽시간에 종결됐다. 강기훈씨는 분신자살한 전민련 김기설 사회부장의 유서를 대필한 혐의(자살방조)로 기소돼 1심에서 3심까지 유죄를 선고받고 복역했다. 강씨는 2008년 사건의 핵심 증거인 필적감정서가 위조된 사실이 밝혀져 재심 청구 끝에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의 1심 재판부는 91년 12월 공소사실 전부에 유죄를 인정하고 강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당시 판결문은 “국과수 필적감정 결과와 숨진 김씨의 여자친구 홍성은씨의 일관성 있는 진술, 검찰이 제시한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강씨가 김씨의 유서를 대필한 점이 인정된다”고 했다. 사건의 주요한 증인이었던 홍씨는 91년 11월7일 재판정에 나와 재판부 말대로 일관성 있게 진술하지 않았다. 홍씨는 수첩의 변조사실에 엇갈린 진술을 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빠져나갈 구멍을 팠다. “여러 증거와 정황으로 볼 때 피고인이 유서를 썼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리면서도 “객관적 진실은 알 수 없으나” 같은 이상한 단서를 달았다. 재판부는 또 “신이 아닌 인간의 판결임을 이해해 달라”고도 했다. 재판부 스스로 진실규명에 실패했음을 인정한 셈이다. 그렇다면 재판부는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판사들의 금언(金言)을 지켰어야 옳았다.

91년 강경대 정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시인 김지하다. 김지하는 91년 5월5일 조선일보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지만, 조선일보는 여기에 조선일보만의 제목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고 제목 달았다. 김지하의 이 글은 이후 박홍 서강대 총장의 “죽음의 배후에 죽음을 선동하는 검은 세력이 있다”는 음모론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김지하는 강경대 정국에 찬물을 끼얹었다.

91년 김지하의 글은 그래도 담백했다. 시작부터 “젊은 벗들! 나는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는 단문으로 작성됐다. 결론도 “소름 끼치는 의사굿을 당장 걷어치워라. (중략) 끈질기고 슬기로운 창조적인 저항행동을 선택하라”며 저항 자체를 거부하진 않았다.

그랬던 김지하는 광우병 촛불이 타올랐던 2008년 10월9일 프레시안에 ‘좌익에 묻는다’를 기고했다. 2008년의 김지하는 91년의 김지하보다 훨씬 더 이상했다. 글 곳곳에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자신이 지켜본 좌파 운동가들의 추한 모습을 필요 이상으로 부각시켰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 어떤 놈은 공적인 문화예산 가운데서 상당 액수를 제 개인 빚 갚는다고 인 마이 포켓 한 놈도 있다고 들었다”고 악다구니를 쳐 댔다. 김지하는 노무현 정부는 진보좌익정권이라는 명제로부터 출발하지만, 노무현 정부를 살아 냈던 서민들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김지하는 2008년의 글에서 ‘죽음의 굿판’ 시즌2에 도전했지만 세상은 이미 그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유서의 필적조회 자체가 조작된 사실만으로도 91년 ‘죽음의 굿판’은 오히려 김지하가 춘 셈이다. 김지하의 글은 검찰의 강압수사에 힘을 실어 주고 법원의 오판에 지렛대가 됐다. 91년 검찰의 충실한 앵무새 역할을 했던 언론은 이번에도 단 한 문장도 반성하지 않고 6억원 배상판결만 건조하게 전달했다.

전 민주노총 미조직비정규직실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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