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고결하고 세련된 느낌을 가지는 시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에 더불어, 그 메시지는 더욱 명료하다. 1970년대 급속한 공업화·산업화의 시대에, 당대인들은 ‘섬’을 품고 있었다. 현대 사회라는 바다 위에서 많은 섬들은 계속 그렇게 외로이 떠 있었을 게다. 많은 군상들을 외롭고 힘겹게 했던 그 섬들은 고립·고독의 또 다른 말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모든 의문은 의외로 간단한 답으로 귀결된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하략)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산업화 시대에 수킬로미터 암흑에서 광부(鑛夫·炭夫)가 캐낸 석탄이 거듭된 손길로 연탄으로 뭉쳐져, 누구인지 모르고 어디인지 모를 누군가의 집과 사무실로 가서 꽃을 피울 때면, 그 석탄은 누군가의 '섬'에 '가게 된' 것이었다. 광부와 누군가가 서로 품고 있는 섬은 연탄의 작열하는 불꽃으로 연결됐다. 그 몇백 원짜리 뜨거움이 사람들에게 소중한 온기로 남아 있었다. 이러한 소소한 인연(因緣)이 사람 사이의 섬을 잇게 하는 길이 됐다고 보인다.

섬과 바다. 바다와 섬. 어쩌면 바다는 섬을 고립시키는 벽(Wall)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바다는 다른 세상(육지, 다른 섬, 또 다른 바다)로 향하는 길(Way)이 된다. 섬은 섬으로서의 존재만이 아니라 섬 밖의 세상(바다와 육지)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존재한다. 섬은 이제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

현재 우리네의 삶은 어떤가. 이제 섬은 사라지고 세상에 바다와 육지가 남아 조화롭게 잘 통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벽으로 가로막혀 있는가. 누군가는 광부를 일컬어 “산업화의 역군”이라고 하지만, 누군가는 세상의 잡일에 “막장”이라는 말을 써먹기도 한다. 누군가는 공공기관·대기업을 “신의 직장”이라고 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 collar exemption·미국 사무직원 배제조항)처럼 근로시간을 초과하며 노예처럼 일한다고 힘겨워한다.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정규직에게 불평등(역차별)을 초래한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누군가는 알바지옥(헬조선)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책임감 있는 근로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제 고민은 그 답을 찾아야 한다. 현재 21세기 대한민국 노동현장에서도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우리네 사이에 존재하는 섬. 그 섬에 "가고 싶다"는 것은 상투적인 소통·관심·공감을 넘어서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각자의 역할과 각자의 가능성을 존중하는 것이고, 누구나 노동현장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어쩌면 공자께서 인의로운 세상의 답이 충서(忠恕)에 있다고 했듯이 우리 노동현장의 답은 존중과 신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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