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어느 노조에서 있었던 일화다. 임금투쟁을 확정하는 대의원대회였다. 임금을 인상해서 그중 일정액을 비정규직기금으로 내놓자고 집행부가 제안했다. 대의원 일부가 반대했다. 노동운동에서 반대하기 힘든 오랜 주장이 작동했다. 투쟁으로 쟁취해야 한다고 했다. 제안은 부결됐다. 회의가 끝나자 대의원 다수는 각자 자가용을 몰고 이리저리 놀러 갔다. 그해 그들은 비정규직 투쟁에 애써 연대하지 않았다. 그해도 정규직 임금인상률이 비정규직보다 높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더 벌어졌다. 그 일화는 특수 상황이 아니었다. 어디선가 흔하게 접했던 장면이리라.

투쟁으로 쟁취하자고? 그래, 맞다. 투쟁으로 쟁취해야지. 투쟁은 노동운동의 본령이다. 그걸 누가 감히 부정하겠는가. 한데 노동조합운동의 처지는 어떤가. 노동자 임금격차가 6배까지 벌어졌다. 끔찍한 계급분단이다. 투쟁은 결코 도깨비방망이가 아니다. 아무 때나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휘두른다고 금은보화가 쏟아지는 게 아니다. 상황에 따라선 다른 방식의 실천이 사회에 더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또한 투쟁이 성공하려면, 숨이 답답할 만큼 꽉 막혀 있는 현장 연대성을 다시 깨우고 사회 신뢰를 회복하는 등 노동운동의 주체 상태와 객관 조건을 변화시키는 전략전술이 풍부해야 한다. 무엇보다 계급성과 연대성의 기반이 되는 측은지심을 일깨워야 한다.

그리고 또 보자. 지난 시절, 시도 때도 없이 입에 투쟁을 달고 살았던 나, 너, 우리…. 사실 투쟁에 모든 걸 쏟아붓지 않았다. 총파업엔 이래서 참여하지 않았고 위력시위엔 저래서 뒤로 빠졌다. 국민임투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도 최저임금 결정 시점의 막바지 집회에 불참했다. 이제 노동조합운동, 좀 솔직하면 안 될까? 투쟁해서 감옥 가고 해고되는 것은 두렵고, 아니 투쟁은 귀찮고, 내 것도 내놓기 싫고, 그래도 투쟁 주장은 버릴 수 없고.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보건의료노조, 그리고 한국노총 공공노련·공공연맹·금융노조로 구성된 양대 노총 공공부문노조 공동대책위원회가 성과연봉제 인센티브 1천600억원을 사회에 내놓겠다고 제안했다. 기금 용도는 비정규직 처우개선과 공공부문 청년고용 확대 등 공익 목적이다. 그걸 위해 노조가 제 몫을 내놓았다.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현대·기아차그룹에 일자리연대기금을 제안했다. 초기자금 5천억원을 그룹 노사가 각각 2천500억원씩 조성하고, 매년 200억원씩 추가 적립하자는 내용이다. 5천억원은 초임연봉 4천만원 수준의 정규직 1만2천여명을 고용할 수 있는 액수다. 200억원은 중소기업이 청년 2명을 고용할 경우 국가가 1명의 추가 임금을 지원하겠다는 문재인 정부 정책과 연동하면 매년 1천500명을 늘릴 수 있는 규모다. 그걸 위해 노조가 제 몫을 사회에 내놓겠다고 제안했다.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가 2007년에 이어 올해도 일자리 확충 및 비정규직 처우개선과 연동한 연대임금전략을 대의원대회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2007년 보건의료노조는 산별중앙협약을 체결했다. 병원 특성에 따라 임금을 4.0~5.3% 인상했고, 그중 정규직 인상분의 1.3~1.8%를 비정규직기금으로 내놓았다. 액수는 330억원에 달했다. 당시 보건의료노조 소속 사업장 비정규직 1만3천553명 중에서 직접고용 비정규직 2천500여명이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전환하지 못한 직접고용 비정규직도 정규직과 똑같은 임금과 동등한 대우로 차별을 시정했다. 간접고용 비정규직에게도 복리후생 확대와 임금인상 혜택이 돌아갔다. 그렇게 손잡고 살기 위해 정규직이 제 몫을 아낌없이 내놓았던 것이다.

자,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런 제안과 결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투쟁으로 사측에게서 쟁취해야지 왜 정규직이 내놓느냐고? 양보라고? 마음에 안 든다고? 노동운동 일부에서 못마땅해한다? 좋다. 그렇다면 한번 따져 보자. 특단의 증세는 왜 인정하나. 증세는 사회에 내놓는 내 몫의 양보인데, 그것도 반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증세의 기본 원칙은 많이 버는 사람이 누진적으로 더 내는 것이다. 정규직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 또 있다. 일자리 나누기는 왜 주장하나? 일자리 나누기는 정규직 몫의 노동시간 양보다. 게다가 임금 양보로 연결되는 것인데, 이 또한 반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연대란 무엇인가. 연대는 내 몫을 내놓는 것이다. 연대는 내 시간을 양보하는 것이고, 감옥에 가면 내 자유를 내놓는 것이고, 해고되면 내 일자리를 내놓는 것이고, 내 인생 자체를 내놓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내 임금 일부를 내놓는 것은 안 되는가. 자본가계급에게 내놓는 것도 아니고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비정규직과 청년실업자와 하청노동자에게 내놓자는 것인데.

당연히 우리는 투쟁연대를 실현해야 한다. 임금연대는 그것을 위한 토대 구축이다. 자기 몫을 움켜쥐고 내놓지 않는 노동자와 아낌없이 내놓는 노동자 중에서, 누가 더 투쟁연대에 적극적일까. 노동자들이 제 몫을 더 내놓는 훈련이 돼야, 무엇보다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서로 움켜쥐려고만 하고 내놓으려 하지 않는 돈을 내놓는 훈련이 된다면, 그것은 투쟁연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내 몫을 내놓으면 노동자 연대의식을 높이고, 사회 신뢰를 회복하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노동자 투쟁 참여도를 높이는 선순환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노동조합운동이 사회적 책임 대열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세 단위 노동조합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 이 흐름이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임금을 훨씬 더 많이 인상하는 상박하후로 진전하길 기대해 본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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