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우람 기자
문재인 정부가 새로운 일자리 창출 모델로 ‘광주형 일자리’를 주목하는 가운데 뼈대를 세우는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지역 노사민정이 참여하는 광주시 더나은일자리위원회가 최근 광주형 일자리 4대 원칙을 담은 기초협약을 체결한 것이 대표적이다.

적정임금과 적정 노동시간으로 개별 노동자에게 안정적인 노동환경을 제공하고, 원·하청 관계 개혁과 노사 책임경영을 실현해 일자리를 둘러싼 생태·환경을 진전시키겠다는 취지다.

더나은일자리위는 주제별로 속살을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지난 23일 오후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광주형 일자리 정책 토론회(적정 노동시간 실현 전략)’를 열었다. 이날 주제발표를 한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일자리 붓기 빼기'를 통한 '스몰에이(a) 일자리 늘리기'를 핵심 전략으로 내놓았다. 퉁퉁 부어 있는 A급 일자리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임금감소를 다소 감수하는 방식으로 일자리를 늘리자는 주문이다.

토론자들은 서울시가 진행 중인 노동시간단축 시범사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스몰에이 일자리가 하향평준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토론회는 더나은일자리위 실무위원회가 주최했다.

"일자리 유형 네 가지, 모두 퉁퉁 부어"

박명준 연구위원은 한국 사회 일자리가 크게 두 가지를 기준으로 4가지 형태로 구분돼 있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는 고용안정 보장 정도, 다음이 임금·복지 등 노동조건이다. 예컨대 고용이 안정돼 있고, 임금도 높은 공기업 정규직은 A, 고용이 불안하고 임금도 낮은 저숙련 간접고용 노동자나 알바 등은 D에 해당한다. 임금은 높지만 고용이 불안한 고숙련 프리랜서는 B, 반대인 공공부문 무기계약직은 C로 분류한다.

박 연구위원은 "광주형 일자리는 A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되, 처음부터 대문자 A를 만들어 내는 것이 힘들다면, 상대적으로 작은 스몰에이(a)를 추구해 보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노동시간과 관련한 거시적 환경변화가 스몰에이 일자리 늘리기의 주요 전략이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A·B·C·D 유형을 막론하고 장시간 노동 문제가 만연해 있다는 얘기다.

201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기준 우리나라 노동자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천113시간으로 멕시코(2천246시간)와 코스타리카(2천230시간)에 이은 3위다. 박 연구위원은 “모든 일자리에서 노동시간이 빵빵하게 채워져 있고, 퉁퉁 부어 있는 상태”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어 “일자리 붓기를 빼는 보편적 실천을 통해 광주형 일자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며 “지금처럼 과도한 노동시간이 투입되는 일자리에서 그 양을 줄이는 것 자체가 일자리 질 상승을 도모하고, A를 a로 만들거나 B·C·D를 a를 향해 움직이도록 만들 유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적정 노동시간, 적정임금과 공생해야"

박 연구위원은 “A가 a가 되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장시간 노동과 대기업들이 수시로 꺼내 드는 희망퇴직 등을 감안했을 때 A를 이상적인 일자리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연대임금 성격을 띤 적정임금이다. 적정 노동시간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A가 스몰에이가 되면 노동자가 수령하는 임금이 낮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박 연구위원은 “투입되는 노동시간 전체의 양을 줄여 임금총액을 줄이는 것을 사고하는 과정에서 적정임금과 적정 노동시간의 조우가 이뤄질 것”이라며 “A의 일자리에서 과도한 고임금을 지양하고, 장시간 노동을 줄여 a를 창출하면서, B·C·D의 a를 향한 상향변동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적정 노동시간 달성의 전제는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사 모두의 노력이다. 노동시간단축이 기업과 노동자가 입을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일자리 창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박 연구위원은 광주형 일자리 모델의 적정 노동시간 달성 전략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우선 밀도 있는 노동관행이다. 노동자 스스로가 짧은 시간에 생산성 향상을 적극적으로 도모하는 방식으로 일해야 한다. 기업은 노동자를 소모품이 아닌 적극적인 생산주체로 인식한다. 인력조직 시스템을 구축할 때 이러한 인식을 담아낼 필요가 있다.

근로시간 유연화도 중요한 전략이다. 박 연구위원은 독일의 ‘근로시간 계좌제’를 예로 들었다. 근로시간 계좌제는 초과노동이 발생할 경우 임금 대신 대체휴일 등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식으로 보상하는 것을 뜻한다.

임금체계 개편도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안 중 하나로 꼽힌다. 한국 임금체계는 기본급 비중이 지나치게 낮다. 수당을 비롯한 변동급 비중이 높아 장시간 노동을 유발한다. 기본급 비중을 높이는 설계가 필요하다.

끝으로 생산성 향상이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도록 별도 조정기제가 요구된다. 기업들이 생산성 향상을 인건비 절감 근거로 악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연구위원은 “노조를 포함한 노동의 이해 대변체와 지역사회 거버넌스가 나서 고용친화적 방식으로 노동시간단축을 주도해 가고, 그것이 일자리의 질과 양을 늘리는 방향으로 작동하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광주시 공공기관부터 적정 노동시간에 맞춘 광주형 일자리를 만들어 나가자"고 제안했다.

"사회안전망 강화하면 초과노동 잡는다"

참가자들은 발표자 의견에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적정임금 전환이 급진적으로 이뤄질 경우 부작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준형 공공운수노조 정책기획실장은 “발제자가 A 대신 a를 만들거나 A를 a로 전환하는 방안을 내놓았는데 기존 노동자들의 처우를 낮추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며 “공기업·대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을 하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임금인상률을 줄이는 방식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영현 광주경영자총협회 상임이사는 “프랑스는 일자리 창출을 위해 주간 노동시간을 35시간으로 줄였다가 일자리 확대가 미미하자 다시 노동시간을 늘리는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며 “노동시간을 주당 52시간으로 단축하는 것은 중소기업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점진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복지를 확충해야 노동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장홍근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노동자들이 초과노동에 집착하지 않도록 주택·양육·교육·노후생활 등에 대한 두터운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며 “정부는 초과노동을 시간으로 보상하는 근로시간 계좌제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박태주 노사정서울모델협의회 위원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광주형 일자리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서울시 사례를 참고하라고 조언했다. 서울시는 올해 초부터 일부 산하기관에서 주 40시간 노동 상한제와 연차 100% 사용, 남성 육아휴직 3년 사용, 근로시간단축 청구권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동시간단축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

박태주 위원장은 “서울신용보증재단 등 시범사업 기관 직원들의 만족도가 상상 이상으로 높다”며 “내년부터 서울시 전체 산하기관으로 사업을 확대 적용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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