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우람 기자
“전력이 민영화되면 가장 먼저 (전기가) 끊기는 곳이 이곳 같은 도서산간입니다. 돈이 안 되는데 설비와 사람을 심어 놓을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죠. 도서산간은 물론이고 국민 전체를 위해 값싸고 질 좋은 전기를 공급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난 17일 오전 인천 옹진군 덕적도 남단에 위치한 밧지름해수욕장. 해변을 바라보고 왼편에 위치한 소나무 숲에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둥그렇게 앉은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한곳을 바라봤다. 귀를 쫑긋 세우고 전력을 비롯한 에너지산업에 공공성이 왜 필요하지 쏟아지는 말들을 주워 담았다.

전설(?)로 기억되는 15년 전 발전파업 투쟁에 얽힌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초대위원장으로 파업을 이끈 이호동 노동자투쟁연대 대표가 최근 책을 펴냈다. 제목은 <전력질주>(매일노동뉴스). 책의 의미와 뒷얘기를 설명하는 조촐한 북콘서트가 이날 열렸다. 전기 공공성을 되새기기 위해 장소는 작은 섬마을로 정했다. 백두산 평화기행으로 저자와 인연을 맺은 ‘백두드림’ 멤버들과 발전노조 도서전력지부 간부들이 북콘서트에 함께했다. 부성현 매일노동뉴스 공동대표가 사회를 봤다.

"세계 흐름에 역행한 전력산업 민영화"

사회 : 북콘서트를 하려면 전력산업과 관련한 몇 가지 키워드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제가 몇몇 키워드를 제시하면 저자께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하자. 우선 민영화 추진의 도화선이 됐던 전력산업 구조개편 법률에 관해 설명해 달라.

이호동 :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하고 얼마 후인 1898년에 경복궁 건청궁에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한다. 이후 한미전기회사와 한성전기회사 등으로 발전한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전기회사가 난립했는데, 그것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광복을 맞았다. 이후 5개 회사가 전력사업을 하다, 남북 분단을 거치면서 1961년 한국전력주식회사로 통합된다. 80년 이후 한국전력공사로 재편됐다. 발전·송전과 배전·판매에 이르기까지 전력산업의 주요한 4개 부문이 통합체제로 운영됐다. 그런 상황에서 외환위기를 맞았다. 정부는 알짜 공기업을 팔아서라도 위기에서 벗어나려 했다. 국민적 공감대도 형성됐다. 그러자 국가 기간산업을 민영화하면 더 큰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반대 투쟁이 대두됐다. 중요한 것은 세계적으로 전력산업 추세가 80년대 민영화 논쟁을 겪다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가 되면 ‘민영화가 되면 큰일 나겠다’는 쪽으로 흐름이 변했다. 민영화가 되면 전기요금이 폭등하고, 툭하면 전기가 끊기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전기를 공기업화하거나 국가적 통제를 강화하는 시기인데, 우리나라만 세계적 흐름과 반대되는 민영화를 추진한 것이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에 대한 관성 탓에 국민적인 반대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야 만장일치로 10년 한시법, 10년 안에 민영화를 완료하는 내용의 전력산업 구조개편 촉진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그렇게 민영화 동력이 생겼는데, 전력노조 집행부가 그 이전에 직권조인을 해 버렸다. 기적이 일어나야지만 민영화가 중단될 상황에 처한 것이다.

2000년 12월 문제의 법률이 제정됐다. 이듬해 민영화 사전 단계로 발전부문이 5개사로 분할됐다. 이호동 대표가 발전노조 초대위원장으로 출마하며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배신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자"였다.

“현장 전문가이자 국가 기간산업을 민영화로부터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는 자부심도 있었고, 두려움도 있었죠. 국민과 여야 국회의원들이 다 넘어간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래도 국민과 후대에 미칠 파장을 감안해 투쟁할 수밖에 없다는 사명감이 컸습니다. 그래서 ‘가자 민주노총으로’ 구호가 나온 것이죠.”

사회 : ‘문명’에서 명자가 밝을 명이듯 전기는 어느덧 우리에게 물과 공기 같은 필수공공재가 됐다. 전기가 가정까지 오는 단계를 설명한다면.

이호동 : 전력생산 원리를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자전거 타이어를 돌리면 불이 들어오는 것과 같다. 동력을 뭘로 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수력은 낙차, 원자력은 우라늄, 화력은 여러 화석연료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한다. 온갖 발전소들이 있지만 발전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발전이 되고 나면 전기를 선로로 보내 송전을 하고, 각 변전소에서 전압을 낮춰 배전을 한다. 전기는 수요와 공급이 항상 일치해야 하는 유일한 재화다. 늘 부족하지 않게 공급여력을 갖춰야 하고, 너무 많아도 안 된다.

"원가 이하로 판매하는데 민영화라니"

사회 : 본론으로 들어가자. <전력질주>에 파업과 파업 이후 벌어진 일들이 정리돼 있다. 책을 내게 된 계기는 무언가.

이호동 : 긴 이야기를 짧은 시간에 하기 힘드니 간략하게 말씀드리겠다. 나머지는 책을 참고해 주시면 좋겠다. 한마디로 불면증에 좋은 책이다.(웃음) 전문적인 내용이 많고 읽기에 부담스러운 책이라는 얘기다. 사료로 남기려는 목적이 크다. 원래는 발전파업 20주년을 맞는 2022년에 내려고 했는데 조금 앞당겨졌다. 지금은 파면돼 구속돼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해 6월 다시 민영화 계획을 발표했다. 같은해 박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되기 전날 기획재정부 공공기관운영위원회가 남동발전과 동서발전의 기업공개(IPO) 방식 민영화를 결정했다. 국정농단으로 코너에 몰려 있는 정권이 지지받지도 못할 민영화를 또다시 강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급하게라도 자료를 정리해 대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만든 책이 <전력질주>다.

이호동 대표는 책 제목과 관련해 “고 1때까지 육상을 하다 보니 하던 버릇이 있어 ‘질주’ 같은 표현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과거 파업 당시에도 언론 인터뷰가 있으면 ‘스타트는 느려도 스퍼트는 강하다’는 표현을 자주 했어요. 책 제목의 본래 의미는 지금껏 죽기 살기로 달려왔다 뜻입니다. 전력의 질은 어떠해야 하고, 주인은 누가 될 것인지를 생각해 보자는 의미도 있고요. 전력산업의 목표는 국민을 위해 질 좋은 전기를 값싸고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주인은 당연히 우리 모두가 돼야죠.”

북콘서트 전날 참가자들은 덕적도에 전기를 공급하는 발전소를 방문했다. 발전소에는 15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다. 7개의 엔진을 돌려 하루 2천900킬로와트 전력을 생산해 1천700여명의 주민들에게 전기를 공급한다.

조영만 소장은 “킬로와트당 450원 정도 원가가 발생하는데 판매는 140원에 한다”며 “나머지는 전력산업 기반기금으로 지원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호동 대표는 “전기가 민영화돼서는 안 되는 이유”라며 “발전단가에서 연료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70~80%인 상황에서 민영화가 되면 도서산간 지역의 전기는 언제 끊길 지 모르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부를 상대로 한 기막힌 대역전극”

사회 : 2002년 발전파업을 얘기해 보자.

이호동 : 특별법이 일사천리로 통과된 상황에서 파업에 나섰다. 파업 돌입 일주일 후 사측이 파업을 하던 5천49명 전원 해고를 예고했지만 파업을 멈추지 않았다. 처음엔 ‘철밥통 파업’이라고 매도하던 보수언론도 일주일 내내 그것만 쓸 수 없었다. 해고를 하겠다는데도 왜 파업을 하느냐. 이것을 보도할 수밖에 없는 시점이 온 것이다. 그렇게 점차 언론의 논조가 바뀌었다. 5천여명의 조합원들이 전국을 다니며 선전전을 했다. 그야말로 기적적인 여론 반전이 일어났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민영화를 해야 한다던 국민이 달라졌다. 당시 한길리서치 여론조사 결과 86%의 국민이 민영화를 반대한다고 했다.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힘들긴 했지만 이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십명이 구속되고 348명이 해고됐다. 마지막까지 파업을 독하게 했던 3천800명이 징계를 받았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후손들을 위한 파업으로 인한 징계와 구속·수배를 훈장처럼 여길 것’이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38일을 버텼다. 2003년 3월28일 발전회사 경영권 매각을 중단한다는 조치가 내려졌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다. 노동운동이 정부를 상대로 이와 같은 대역전극으로 승리를 거둔 역사는 전무후무하다고 생각한다.

사회 : 2004년 섬에서 자체 설비로 전력을 생산해 해당 지역에 공급하는 노동자들의 파업도 있었다. 당시 상황을 최대봉 발전노조 도서전력지부장으로부터 들어 보자.

최대봉 : 도서전력노조는 1999년 만들어졌다. 과거 큰 섬은 한국전력이 운영하고 작은 섬은 정부나 지자체 공무원들이 발전설비를 운영했다. 그것을 1996년부터 한전 오비들이 만든 전우회가 운영하게 된다. 고위층이 퇴직하고 자기들의 먹거리를 위해 만든 전우실업주식회사, 지금의 ㈜제이비씨다. 자체 발전소를 운영하는 65개 섬이 한꺼번에 인수됐으면 노동자들이 뭐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몇 년에 걸쳐 한두 개 섬의 발전권을 인수했다.

작은 섬의 경우 1~2명의 노동자가 일하는데 전우회가 찾아와 자기들 쪽으로 넘어오라고 한다. 그전까지는 공무원 신분이었던 사람들을 상대로 말이다. 안 넘어오면 자르겠다고 하니 울며 겨자 먹기로 넘어갔다.

보통 회사가 100만원 이상 월급을 줄 때 70만원을 받았다. 30개 정도의 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게 됐다. 만들자마자 그해 회사에서 임금을 24% 올렸다. 10% 인상안을 가져갔는데 말이다. 다음해엔 18% 인상이었다. 노조가 생겼기 때문이다. 임금인상을 몇 번 하니까 노조가 조금 이상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회사 말을 너무 잘 듣게 된 것이다. 그래서 노조 위원장을 탄핵시키고 2004년 상급단체를 바꿨다.

"한전 전우회에 팔린 섬마을 전기노동자"

상급단체를 바꾼 첫해 도서전력지부는 결성 후 처음으로 파업을 했다. 당시 민주노총 공공연맹(현 공공운수노조) 위원장이었던 이호동 대표의 투쟁명령을 따랐다. 조합원 130여명 중 110여명이 상경해 12일간 파업을 했다. 최대봉 지부장은 “한전 오비들이 운영하는 회사다 보니 불합리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며 “당시 파업이 퇴직연금과 사내복지기금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파업 이후 사측의 노조 탈퇴 압박이 지속됐다. 조합원들이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 보니 조합원 감소를 막기 힘들었다. 최 지부장은 “사측이 노조를 탈퇴한 조합원 1명당 20만원의 회식비를 지원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조합원이 20여명까지 떨어진 때도 있었다.지금은 70여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사회 : 에너지 공공성을 확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호동 : 바람직한 전력산업 구조를 위해 토론을 전개해야 할 시점이다. 한국의 전력산업은 공적소유 구조여야 한다. 운영은 '발전-송전-배전-판매'로 이어지는 수직통합 체계여야 한다. 발전소 방문에서도 말했지만 전기를 만드는 데 있어 발생하는 단가의 핵심은 연료비다. 그 연료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다. 민영화를 하기도 전에 발전을 5개 회사로 나눠 경쟁시켰더니 저가원료 경쟁만 일어났다. 깨끗한 전기를 생산하려면 친환경 설비에 투자해야 한다. 이러한 일은 민간이 아닌 공기업이 할 수밖에 없다. 독일은 재생가능 에너지 발전량을 20~30% 수준까지 올렸다. 오랜 세월이 걸렸다. 법률 역시 민영화법이 아닌 지속가능한 에너지체제로 전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전력산업은 분할민영화가 아닌 통합공영화로 가야 한다. 동북아 전력망을 구축해 통일시대 이후를 대비하는 것 역시 전력산업이 갖는 역사적 책무다.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이러한 대원칙이 흔들려선 안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을 확인하고 내가 맡은 운동의 임무를 마치기를 고대한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