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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바세나르로
   
▲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네덜란드 서부 해안도시 헤이그. 우리에게는 이준 열사가 1907년 2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2년 전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호소하며 조선 주권회복 운동을 전개하다 의문의 순국을 한 곳으로 알려진 도시다. 헤이그 바로 옆에는 바세나르(Wassenaar)라는 소도시가 붙어 있다. 도시 전체가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네덜란드 왕의 것까지 포함한 아름다운 별장과 저택으로 가득한 평화로운 소도시다. 사회정책이나 노사관계 영역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바세나르라는 도시명은 특히나 익숙하다.

그 이유는 1982년 노와 사가 주도해 네덜란드 노동시장의 전환을 이루고 훗날 '더치 미러클(Dutch Miracle)'로 칭해진 성공적인 개혁의 견인차였다고 평가받은 사회협약, 이른바 '바세나르 협약'을 체결한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저성장과 노사갈등의 진통 속에 놓여 있던 상황에서 새로 출범한 네덜란드 정부는 노와 사에게 타협을 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정부의 간절한 요청에 노와 사가 대승적으로 결단해 화답을 한 것이 바세나르 협약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네덜란드에는 1945년 출범한 노동재단(Labor Foundation)이라고 하는 사회적 대화기구가 존재한다. 대표적인 노동조합들과 대표적인 사용자단체 및 비즈니스단체들이 참여해 양자주의(bilateralism) 방식으로 사회적 대화를 전개해 가는 플랫폼이다. 쉽지 않은 입법과제, 개혁과제를 놓고 있을 때, 네덜란드 정부는 일단 노동재단에 의뢰해 노와 사가 타협을 해 줄 것을 요청하곤 한다. 모든 의제에 타협하기는 어렵지만, 위기에 대한 공감의식이 깊어지면 종종 노동재단으로부터 사회협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도 한다.

노동재단 말고도 사회경제위원회(SER)라고 하는, 노사정 대표가 참여해 꾸려 가는 삼자주의(tripartism) 논의기구도 1950년 출범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존재한다. SER이 정부와 노사가 중장기적인 측면의 주제를 놓고 정책협의(policy concertation)를 통해 경제·사회·노동정책의 적절한 수립을 도모하는 곳이라면, 노동재단은 상대적으로 단기적이고 현안 중심적 논의를 통해 정책의 형성 및 실행을 검토하고 결의하는 장이라고 보면 된다.

노동재단에서 노사 간 사회협약이 체결되면, 이는 입법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존중된다. 더불어 노동재단에 참여한 대표단체들은 해당 협약을 각 업종마다 어떻게 이행해 갈지를 놓고 내부 주체들에게 권고하며 책임 있는 이행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세워 간다.

이미 체결된 사회협약의 실행을 놓고 노동재단 내부 다양한 소위원회(working committees)에서 지속적인 사회적 대화를 전개해 간다. 그러한 논의는 몇 년 후 다시 새로운 협약 체결로 이어지기도 한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최근에 체결한 사회협약은 2013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취지에서 생성됐다. 현재까지 노동재단은 그것의 세부적인 이행을 놓고 사회적 대화를 하고 있다.

전술한 바세나르 협약 역시 35년 전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몇 차례 ‘새끼협약들’이 재생산돼 90년대까지 이어졌다. 당시 협약은 네덜란드의 경쟁력 회복을 위해 '고용의 재분배(re-distribution of employment)'를 도모한다는 취지하에 노동시간을 줄이고 양질의 시간제 일자리를 마련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삼았다.

합의문 자체는 그다지 길지 않았으나 영향력은 엄청났다. 협약을 주도했던 노총(FNV) 위원장 빔콕(Wim Kok)은 후에 네덜란드 수상에까지 올랐다. 노동계가 노동정치 주도권을 쥐고 나가게 만든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준 것도 바세나르 협약이었다.

사회적으로 시간제 일자리가 많아진 것은 1차 노동시장 내부에 균열을 불러일으켰다는 측면에서 비판을 가할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있겠으나, 최대한 균열과 갭이 크지 않도록 만들려 했고, 사회보장으로부터 시간제 일자리 종사자를 최대한 포함시켰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양질의 정규직 시간제 모습을 띠었다.

결과적으로 사회협약이 계기가 돼 만들어진 이러한 일자리들이 대폭 증가하면서 노동시장은 새로운 활기를 띠어 갔다. 고질적인 네덜란드병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의 한 수와 같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2017년 한국은 신정부 출범 이후 일자리 질서의 근본적 개혁이 요구된다. 양질의 일자리 기회를 최대한 확대함과 동시에 격차축소를 향한 노력이 시급하다. 공공부문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단기적 처방으로 그 시작에 불과하다. 향후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유연화시키는 작업, 임금을 조정하고 또 유연하게 하는 작업 등 다양한 정책기제와 수단을 고안하고 함께 결합하면서 우리의 일자리 질서의 상향 균형화와 양적 확장을 도모해 가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정부 주도 '일자리위원회'만 바라보는 것만으론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명약관화해지고 있다. 조정(coordination)이 연대(solidarity)를 지향하며 활성화하고, 그것이 다시 혁신(innovation)으로 이어져야 한다. 위기탈출의 돌파구와 질적 도약의 기회를 계속 만들어 가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된 한국형 바세나르 협약 출현이 절실한 때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mjnpark@kli.re.kr)

박명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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