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대통령이 바뀌니 일순 세상이 바뀌었다. 후퇴와 역주행으로만 치닫던 비정규직 문제 개선과 해결 전망도 밝아졌다. 2012년 박근혜 대통령 당선 직후 줄지어 목숨을 끊었던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떠오른다. 참담한 비극 앞에서 말을 잃었던 때와 비교하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회 공기가 좋아졌다. 촛불시민혁명에 힘입어 출범한 새 정부가 국정농단으로 호흡곤란에 빠진 국민에게 산소호흡기가 돼 준 셈이다. 식민과 분단·독재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에서 정치가 희망의 증거가 된 드문 사례다.

비정규직 정규직화도 빠르게 사회적 화두로 부각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첫 현장방문지인 인천국제공항공사의 1만명 정규직화 선언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비정규직 정규직화 추진이 잇따르고 있다. SK브로드밴드의 5천200명 간접고용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분기점으로 민간부문에서도 좋은 일자리 만들기가 확대되는 양상이다.

극심한 병목현상에 시달리다 단번에 사통팔달로 길이 뚫리고 있다. 20여년에 걸친 비정규 노동자들의 지난한 투쟁의 결실이기도 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대세 형성에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보기 좋은 결실을 맺기를 간절하게 소망한다.

호사다마라고 했다. 비정규직 정규직화 추진이 무조건 좋을 수는 없다. 제대로 된 대안 모델이 아니라면 오히려 정체나 후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각각에서 여러 사례가 축적돼 온 만큼 그저 정규직화라고 통칭하는 것으로 자족하는 수준이어서는 곤란하다. 무엇보다 졸속 추진도 우려된다. 이명박근혜 정부 10년과는 정반대인 정부 정책 흐름에 맞추느라 급하게 정규직화를 고심하고 있는 공공기관·공기업·대기업도 많을 테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 비정규직 정규직화의 방향과 목표를 잘 따져 봐야 한다. 일자리 질을 상향 평준화하는 전체 흐름은 바람직하지만 개개 사례에서는 여러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법이다.

우선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문재인표 비정규직 정규직화 모델은 기존 무기계약직 모델을 넘어서야 한다. 이건 참여정부 비정규직 정책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 멈춰서는 안 된다. 한발 더 나아가 서울시 박원순표 비정규직 정규직화 모델을 마지노선으로 새로운 대안 모델을 만들어 가야 한다.

공공부문의 정규직화 모델은 민간부문 정규직화 모델의 시금석이 된다. 꼼꼼하게 설계해야 한다. 고용안정과 합당한 처우개선이 병행되는 양질의 정규직화 모델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돼야 한다. 다양한 간접고용 비정규직 고용형태까지 아우르면서 상시·지속업무 정규직 채용 및 전환 원칙을 지키는 정규직화 모델이 돼야 한다. 그리고 진성 정규직 수준의 모델이거나 자회사를 통한 경로라도 기존 정규직과의 차별이 최소화되는 방식으로 정규직화가 이뤄져야 마땅하다.

현실적인 정규직화 경로와 방안에 대한 노사 당사자 간, 또는 사회적 합의 절차가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 정규직화 모델을 둘러싼 여러 쟁점이 상존하므로 이상적인 수준으로 타협하긴 쉽지 않다. 노사 간 긴밀한 협의를 바탕으로 전문가 자문과 사회적 논의를 거쳐 소모적 논란을 최소화하고 지속가능한 모델을 만들 수 있도록 주력하는 게 중요하다. 당연히 직접고용 정규직화가 가장 안정적이고 바람직한 방안이지만 부문과 직종별로 다양한 정규직화 모델이 있을 수 있고, 정규직화 대상 규모와 소요 재원에 따라서는 단계적인 추진 방안도 필요하다. 중앙정부가 양질의 정규직화를 성사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이해당사자 간 상충되는 이해를 조율하고 공익적 모범사용자로서 소임을 다하면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느냐도 관건이다.

문재인 정부 비정규직 정규직화의 시발이 된 인천공항공사에서 노사 TF와 전문가자문단이 꾸려져 활동을 시작했다. 연내 1만명 정규직화라는 다소 버거운 목표를 달성하려면 공사 경영진의 추진력과 면밀한 노사합의, 심도 깊은 전문가 의견조율 등이 삼위일체로 잘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 정량적 목표에 매이지 않고 양질의 정규직화 모델을 실현할 수 있도록 정규직화의 기본원칙을 바탕으로 실현가능한 로드맵이 잘 마련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추진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의 비정규직 사용사유 제한과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입법 공약과 함께 비정규직 정규직화 확대가 비정규직 규모 감축을 위한 유례없는 호기를 제공하고 있다. 참여정부의 실패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촛불민심을 개혁동력으로 이번만큼은 제대로 된 비정규직 정규직화가 유종의 미를 거두길 기대한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다. 문재인표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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