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현철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15세 노동자의 수은중독 사망과 원진레이온 직업병을 둘러싼 투쟁 등 노동자 건강을 다룰 전문의가 필요하다는 사회적 배경 속에서 1995년 처음 수련과정이 시작된 산업의학과가 지금의 직업환경의학과의 출발이다. 그 시절부터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지키는 데 일조하고자 전공과 진로를 선택했던 많은 의사들이 품었던 희망 중 하나가 노동현장을 누비는 공장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노동자들이 주치의처럼 자문을 구할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을 현장에서 만나기는 어렵다. 사업주와의 사적 계약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특수건강진단 제도가 주도하고 보건관리위탁(대행) 사업은 형식적으로 기능하는 직업건강서비스 구조 탓이다. 특수건강진단은 직업적 유해인자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의 직업성 질환을 조기에 발견하고 예방하고자 사업주가 시행하도록 규정된 제도다. 이러한 취지는 비정상적으로 과잉된 국내 건강검진 시장 구조에서 검진기관의 이윤추구 행태와 맞물려 소위 돈 되는 종합검진 등 기타 검진 유인 목적으로 변질되기 일쑤다.

일하는 사람을 위한 건강관리는 소음·분진·중금속·유기용제를 비롯한 작업환경은 물론이거니와 근골격계 부담작업, 직무스트레스와 감정노동, 노동시간과 노동강도 등 작업 과정 전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만성질환부터 직업병까지 포괄해야 한다.

현재 특수검진은 대상인자의 유해성(hazard)과 표적 장기에 따라서만 결정될 뿐 현장 노출특성(exposure)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률적으로 항목과 대상이 선정된다. 검진기관이 바뀌면 개인의 임상검사 결과 변화 추세를 알 수 없어 위험을 조기에 발견하기 어려운 데다, 근골격계질환·직무스트레스 등의 내용은 담을 수 없는 구조다. 작업 도중 잠깐 나와 길게 줄을 늘어서서 각종 검사를 하고 의사 문진은 전광석화처럼 끝나 버리는 출장 검진의 살풍경은 익숙한 것이 됐다. 현장을 누비며 건강 유해요인을 꼼꼼히 지적질하는 의사는 기업주에게도, 그 기업주에게 비용을 받는 기관에도 달가운 존재가 아니다. 묵묵히 돈이 되는 검진에 매달려 문진만 하는 의사가 환영받는 구조에서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의 현장성은 거세된다.

검진용 문진의사가 아닌 일터에서 노동자들의 주치의로서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의 전문성이 발휘되도록 구조를 바꿔야 한다. 독일과 프랑스처럼 직종과 규모를 불문하고 모든 노동자들이 선임된 직업의학 의사를 통해 소정의 산업보건서비스를 받도록 규정할 필요가 있다. 선임된 의사가 사업장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문진을 하고, 필요한 검진항목을 선정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들은 유급 검진연가를 이용해 병원을 방문해 필요한 검사만을 받고 출장 검진은 폐지함이 마땅하다. 검진 결과를 해석·판정·사후관리하는 것 역시 선임된 의사가 수행하는 것이 옳다. 이는 현재 보건관리 위탁(대행)기관에서 시행하는 직업의학적 서비스를 내용적으로 엄밀히 하는 것이다. 영국의 국가보건서비스(NHS) 주치의를 사업장에 적용한 모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 공장의사를 마땅히 일터 주치의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의 경우 선임된 직업의학전문의는 연간 노동자 1인당 직업 위험에 따라 0.25시간에서 1.2시간까지 보건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노동자 1인당 연간 20~45분으로 산정해 대략 의사 1인당 2천명, 프랑스의 경우는 3천300명의 노동자들을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최근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상 의사 1인당 보건관리수탁 근로자 한계를 오히려 1만명에서 1만5천명으로 늘리는 개정안이 상정돼 있는 상황이다. 모든 노동자에게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을 통한 서비스를 제공하기에는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나 관리대상 업종의 위험도나 직종 특이성에 따라 분류해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를 반드시 선임하는 경우와 직업의학 분야에 대한 소정의 연수과정을 거쳐 인증을 받는 의사를 선임하는 경우도 고려해 볼 여지가 있다.

사업주가 주치의 의견에 따르지 않아 악화한 만성질환을 포함한 질환들은 모두 산재로 인정해 책임을 묻고, 노동자가 의사 의견에 따르지 않는 경우 업무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해서 주치의 견해가 행정적 권위를 가지고 존중받도록 해야 한다. 주치의가 사업주에게 권고한 보건관리상 조치가 지켜지지 않으면 관리·감독기관에 보고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

주치의가 사업주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하도록 프랑스처럼 주치의 해촉을 별도 기관에서 심의해 결정할 것을 제안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촉 사유의 적정성 검토는 노동위원회 같은 기구에서 판단하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물론 행정적 권위가 주어지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부가돼야 한다. 사업장 내 보건상 문제가 발생했고 그에 대한 예방이나 관리조치가 미진했다면 사업주와 더불어 주치의가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이는 의사의 보건관리 대상인원 축소나 자격제한 등을 통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기존 틀에서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만큼이나 틀을 깨는 궁리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 답답한 제도를 겨눈 화살은 더 이상 ‘공장의사’를 꿈꾸지 못하고 노동현장을 떠나 진료실 안에서만 서성이는 우리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들에게도 향한다. 이제 현장을 누비는 일터 주치의를 주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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