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동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일제의 폭압적 지배와 세계대공황 시기에 노동자들의 선봉에 섰던 선진노동자.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발판으로 대륙침략을 시도하던 시기의 담대한 혁명가. 노동자 농민의 신음소리가 식민지 조선 천지를 진동하던 시기에 희망의 빛을 향해 산산히 부서져 간 혁명적 노동조합운동가. 고공농성 투쟁의 시조 강주룡.

강주룡은 1901년 평북 강계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14살 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서간도로 이주했다. 20살에 5살 연하 최전빈과 결혼했으며 남편과 함께 독립군부대에서 일제와 싸웠다. 안타깝게도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던 남편이 죽자 우여곡절 끝에 귀국했다.

1924년 서간도에서 돌아와 사리원에서 일 년여를 살았다. 26년 평양 고무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로 일했다. 친정 부모를 모시고 어린 동생을 보살피며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29년 세계대공황의 폭풍은 식민지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제 독점자본은 공황의 위기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겼다.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임금을 삭감했다. 노동시간을 늘렸으며 노동강도를 높였다. 30년 5월 고무공업 자본가들의 모임인 '전조선고무공업동업연합회'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평균 10% 삭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해 8월1일 평양고무공업동업회에선 한술 더 떠 임금을 17% 깎겠다고 평양고무직공조합에 통보했다. 이에 맞서 평양고무직공조합은 임금인하 반대와 해고 반대 등 20여개의 요구사항을 걸고 7일부터 5개 공장 1천800여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8월11일에는 파업노동자가 2천여명을 넘어섰다. 파업투쟁은 9월 초까지 이어졌다.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 가운데 3분의 2가 여성이었다. 강주룡도 다른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을 함께 겪으며 파업에 참여해 투쟁 경험을 쌓았다.

이듬해인 31년 평양 선교리의 평원고무공장은 회사들의 연합체인 평양고무공업동업회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가장 먼저 임금을 깎으려고 했다. 5월16일 사측이 일방적으로 임금삭감안을 통보했다. 여성노동자들은 임금인하를 반대하며 즉각 파업에 돌입했다. 평양고무공업동업회에 속한 다른 12개 고무공장에서도 임금삭감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투쟁 결과는 다른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2천300여명 노동자들의 임금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였다.

파업에 돌입했지만 사측은 노동자들의 요구에 묵묵부답이었다. 파업 12일차인 5월28일. 파업노동자들은 싸움의 강도를 높였다. 굶어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사측은 노동자 49명 전원을 해고하겠다고 협박하며 경찰을 투입해 노동자들을 강제로 공장 밖으로 몰아냈다.

노조간부였던 강주룡은 광목을 한 필 사서 한밤중에 을밀대 앞에 섰다. 처음에는 죽음으로써 평원고무공장의 횡포와 자신들의 싸움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결심했다. 벚나무 가지에 광목을 걸어 놓고 30여년 살아온 과거를 되돌아보다 ‘옳다, 죽더라도 저 위에 올라가 우리가 싸우는 뜻과 평원고무공장의 횡포를 마음껏 외치고 죽자’고 마음을 바꿨다. 캄캄한 어둠 저편에 을밀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해서 역사적인 을밀대 고공농성이 전개됐다. 동이 트는 새벽 5시 을밀대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에게 투쟁의 이유를 외쳤고 신문에도 보도됐다.

단식과 파업에 지친 몸을 이끌고 고공에서 완강하게 버티던 강주룡의 뒤쪽으로 소방대원이 사다리를 놓고 몰래 올라가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 강주룡은 그물 위로 떨어지면서 기절했다. 평양경찰서로 연행된 강주룡은 5월29일 저녁부터 6월1일 새벽 2시에 풀려날 때까지 단식투쟁을 했다. 풀려난 강주룡은 쉴 틈도 없이 곧바로 파업 본부로 돌아가 파업을 이끌었다. 6월6일 파업단 대표로 사측과 협상에 나선 강주룡은 “임금 감하를 반대하고 맹파했던 우리 직공들도 환원해야 한다. 고주측에서는 명예를 위해서라도 파업 직공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하지만 명예와 일가족의 생사 문제는 전연 판이한 문제 아닌가”라고 따졌다. 사측의 명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일가족의 생사가 달려 있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이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6월8일 1개월에 걸친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사측이 임금삭감안을 철회하고 종전대로 임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히는 성과를 얻고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튿날인 6월9일 강주룡은 일제가 ‘평양 최초 최고의 적색노동조합’이라고 불렀던 평양지역 혁명적 노동조합에 참여한 혐의로 구속됐다. 평양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돼 1년 동안 감옥에서 비타협적인 옥중투쟁을 했다.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 증세로 고통받던 강주룡은 32년 6월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두 달 동안 병마와 싸웠고, 8월13일 평양 서성리 빈민굴 68-28호에서 치열했던 삶을 마감했다. 이틀 뒤 8월15일 100여명의 노동자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장례식이 치러졌다. 목숨 걸고 일제에 맞섰던 독립운동가는 혁명의 꿈을 역사에 남겼다.

봉건사회의 틀을 깨고 시대의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산화한 여성노동자. 목숨 걸고 노동자들의 선봉에 섰던 파업투쟁 지도자. 해방세상을 꿈꾸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가 강주룡을 기록한다.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hdlee20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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