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윤수 축구평론가

나는 지금 <매일노동뉴스> 편집국의 애를 태우면서, 이 칼럼을 쓰고 있다. 노동자의 삶의 조건과 정치경제적 입장을 치밀하게 취재하고 선도적으로 제기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 ‘시선’으로 세상을 새롭게 읽어 온 <매일노동뉴스>의 기념비적인 특별호임에도, 나는 예전과 다를 바 없이 마감시간을 어기고 있다. 그래도 변명을 하자면 지난 26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FIFA U-20월드컵 코리아’ 대회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 대한민국 대 잉글랜드의 경기를 보고 나서야 쓰고 있다는 점이다.

경기 결과는 비록 0대 1로 대한민국이 패했지만 그 내용은 최근 2~3년 사이 국내에서 열린 국제대회 경기 중 최상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잉글랜드의 키어런 도월이 후반 11분에 터트린 결승골을 비롯해 양팀 모두 높은 수준의 경기력, 특히 약속이라도 한 듯 텅 빈 공간을 장악하기 위한 비범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패스는 성인 대표팀 경기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경기 막판까지 눈을 뗄 수 없는 경기를 본 기억이 도대체 언제였던가 싶을 만큼 선수들은 거친 아름다움을 여지없이 보여 줬다.

20세 이하 선수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거의 모든 선수들이 공을 자유롭게 다뤘으며 패스와 슈팅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축구 만화에서 나오는 듯 세련되고 날렵했다. 거의 모든 공격 장면이 ‘하이라이트’로 편집해도 좋을 만큼 머지않아 세계 축구 무대를 장식할 양 팀 선수들 명단은 꼭 기억해 둘 만했다.

한편 이 경기를 지켜보면서 다른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20세 이하의 이 선수들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문득 떠오른 이 생각은 한국에서 축구 선수로 살아간다는 것으로 이어졌고 아쉽게도 이 대회에는 참여하지 못한, 그것도 스타플레이어 자질을 갖지 못한, 그러나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무명의 젊은 선수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 그런 생각을 거듭 하게 됐다.

다른 종목에 비해 시장 규모가 크고 비교적 다양한 선택이 가능한 축구와 야구에서도 무명 선수들이나 연습생들의 처지는 심각한 불평등에 처해 있다. 이에 대해 ‘프로스포츠는 원래 능력과 경쟁의 세계 아닌가’라고 한다면 한편 수긍하면서도 한편 냉혹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스포츠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살인적인 경쟁의 ‘헬조선’이고, 이 헬조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적 연대의 힘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 최근 추세이고 사회적 합의라면 여기에 스포츠 선수들 역시 응당 포함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장 규모가 크고 그 능력과 스타성이 입증된다면 일반적인 노동자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돈을 버는 것이 프로스포츠 세계지만 그 언덕, 즉 스타덤에 오르는 선수는 그리 많지 않으며 간신히 그 대열에 낄 수 있다 해도 평생이 보장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빛과 그림자의 농도가 지나치게 뚜렷한 프로스포츠의 무명 선수들에게 미래란 막연하게 펼쳐져 있는 막막한 시간일 뿐이다.

이 칼럼이 <매일노동뉴스>에 실리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평소부터 스포츠 선수를 한편으로는 팬의 사랑을 받고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스타’이면서도 동시에 과중한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비정규 노동자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해 왔다. 조금 양보해 말한다면 당장 현역으로 뛰고 있는 선수는 아닐지라도 이 세계에 종사하는 각급 지도자나 코치는 마땅히 노동자 삶의 조건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일단 객관적인 상황으로 보면 한국 스포츠계의 낡은 틀이 오랜만에 깨질지도 모르는 긍정적인 조건이 형성되고 있다.

대통령선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지난달 9일 서울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2017 대한민국 체육인대회’가 열렸다. 과거에 스포츠 선수들이 많이들 모여서 하는 대회란 것은, 사열 종대로 서서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 오른팔을 크게 흔들면서 결의하고 맹세하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21세기고 게다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의 국면이다. 스포츠 단체와 선수들이 정치권력에서 독립해 스스로 자립·자생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아 스포츠 단체와 선수들이 자신들의 요구와 주장을 외칠 수 있었다.

주요 대선후보들도 이날 대회에 참석해 정유라 입시비리나 평창올림픽과 관련된 검은 의혹들, 즉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핵심 사안인 ‘한국 스포츠의 적폐 청산’에 대해 정견을 피력했다. 당시 심상정 정의당 후보는 “체육인들의 열악한 생활 여건과 훈련 환경은 비정규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했고,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도 “스포츠 강사들을 위해 정규직 채용을 의무화하는 법 개정을 통해 반드시 정규직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이 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국민의 생애주기별 맞춤형 스포츠를 확대해 그에 맞는 생활체육 지도자를 많이 양성하고 확대 배치하겠다”고 했다.

물론 각 후보들이 이렇게 한 가지 의견만 피력한 것은 아니고 내가 임의로 중요한 점들을 골라 본 것인데, 적어도 스포츠에 관한 주요 후보들의 정책 방향은 대동소이했다. 체육계를 지배해 온 구조와 인사·예산·정책들, 그리고 체육인들의 노동조건·고용관계·훈련시설 그리고 무엇보다 억압적인 위계문화 혁파 등에 있어 사실 이견이 있을 수는 없다고 하겠다.

중요한 것은 체육계 스스로의 자정 의지와 개혁의 실천이다. 이 역시 당위적으로 천명되고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의 구체적 실천이 지금 당장 필요한 시점이다. 국위 선양, 금메달, 억대 연봉 등의 신기루를 조금은 걷어 내고 이 짜릿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참여하는 많은 선수들이 적정 수준 이상의 훈련(노동) 조건과 비교적 양호한 관계(노동계약) 설정, 자신들의 목소리를 스스로 낼 수 있는(결사체 조직) 상태로 진전돼야만 한다.

이렇게 다시 강조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구체적인 현실이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출신으로 프로축구 광주FC에서 잠시 뛰었던 히카르두 바호스(바로스)는 한국 축구에 대해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비판한 적 있다. “프로들이지만 어린아이들처럼 다 같이 살고 있다. 심지어 코치들도 그렇다. 오전 9시에 훈련장에 들어가서 오후 7시에 훈련을 마친다. 심지어 훈련 시작 전 이른 아침 시간에도 몇몇 선수들은 운동을 한다. 한국 사람들은 일하기 위해 살고, 토요일엔 술을 마신다. 돈이 많지만, 쓸 줄 모르는 것 같다. 틀린 말을 해도 반박의 기회는 없다. ‘네, 감독님’이라는 말만 해야 한다. 실수라도 하면 혼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바호스 선수는 부상을 크게 입은 탓도 있지만 ‘공교롭게도’ 이 인터뷰 이후에 포르투갈로 돌아갔다. 구단은 바호스와의 계약을 해지해 버렸다. 스포츠 선수들의 구체적인 현실은 여전히 이런 상태이고, 구단은 이런 (노동)조건에 대해 선수들이 뭐라도 자기 목소리를 내면 여지없이 계약을 해지해 버린다. 이런 상황의 실질적 개선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이므로, 나는 20세 이하 선수들의 놀라운 실력을 감탄하면서도 동시에 끝없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축구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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