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대 노총 공공부문노조 공동대책위가 지난 18일 공공부문 성과연봉제 폐기와 노정협의를 문재인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노동계는 노정교섭 정례화를 사회적 대화 참여의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있다. 정기훈 기자
민주노총 14차 대의원대회가 열린 1999년 2월24일 오후 서울 용산구민회관. 이갑용 당시 위원장은 “무용지물인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하고 총력투쟁에 돌입한다”고 선언했다.

98년 6월 노정교섭과 같은해 7월 노사정 교섭에서 합의한 교원노조 합법화, 노동시간단축, 정리해고에 따른 고용안정대책, 부당노동행위 엄벌 같은 합의 이행이 지지부진했다. 정리해고·파견근로 법제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사정 잠정합의안을 98년 2월 대의원대회에서 부결시키면서 민주노총의 마음은 이미 노사정위로부터 떠나 있었다. 민주노총은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옛 노사정위원회)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있다.

지난해 1월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 회의실. 한국노총 중앙집행위원들은 4시간 동안 격론을 했다. 쟁점은 전년 9월15일에 도출된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한 노사정 합의 파기 여부였다. 결국 노사정 합의를 파기하고 노사정위에 불참하되, 발표만 며칠 늦추기로 결정했다. 98년 노사정위가 출범한 이래 한국노총이 합의를 철회하거나 무효화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동만 당시 위원장은 “정부와 여당은 노사정 합의를 하자마자 합의와는 다른 내용의 노동정책을 추진했다”며 “많은 인내를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고 토로했다.

“한국형 사회적 대화기구, 민주노총도 참여해야”

민주노총이 99년 노사정위를 탈퇴한 뒤 대한민국의 사회적 대화는 사실상 반쪽자리였다. 전체 노동자의 10%만 노조에 가입해 있는데, 그중 절반을 대표하는 노동단체만 사회적 대화기구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철수와 복귀를 반복했다. 지난해 1월부터는 한국노총마저 철수하면서 사회적 대화는 자취를 감췄다.

그런 가운데 “한국형 사회적 대화기구를 만들어 노동존중 사회 기본계획을 수립하겠다”고 공약한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동계를 들러리로 내세우거나 아예 배제한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비교된다.

새 정부는 사회적 대화기구 논의 의제를 고용복지·사회안전망 강화 같은 고용과 연계된 복지영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비정규직·하청·청년·여성을 대변할 수 있는 노동자 대표와 대기업·중소기업·제조업·서비스업을 포함한 재계 대표까지 구성원을 넓히겠다는 구상이다.

그런데 새로운 내용이 아니다. 지금까지 제안되거나 법안으로 발의된 노사정위 개편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 강조한 '한국형 사회적 대화기구'는 어떤 모습일까. 대선 기간 노동정책 공약을 만들었던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민주노총까지 끌어들이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 관계자는 “지금의 노사정위에는 죽어도 못 들어오겠다고 하는 민주노총이 들어올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대통령소속 자문기구인 노사정위를 방송통신위원회나 공정거래위원회처럼 상설 정부위원회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안 발의나 감독을 할 수 있도록 독립성을 보장하자는 취지다. 노사정 합의를 이행하기도 쉽다. 한국노총의 대선공약 요구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방안은 최종 공약에 담기지 못했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정부위원회가 된다고 해서 민주노총이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나 사회적 대화기구에 대한 민주노총의 불신을 제도개선으로 해소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정부가 진정성 보여야” 서두르지 않는 양대 노총

양대 노총은 사회적 대화기구 참여 또는 검토의 전제조건으로 노정교섭과 신뢰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19대 대선을 앞둔 노동절에 문재인 대통령과 정책연대협약을 맺었다. 노정교섭 또는 노정협의에 합의한 셈이다.

민주노총은 지난 12일 ‘노동존중 사회 실현을 위한 노정교섭’을 제안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답변을 하지는 않았지만 마다할 이유는 없다. 양대 노총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겠다고 밝힌 만큼 어떤 형태로든 대화가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노동계는 정부 행정력을 동원한 노동현안 해결에도 주목하고 있다. 노동부의 공정인사(일반해고) 지침과 취업규칙 해석 및 운영지침 폐기, 단체협약 시정명령 취하, 노동시간과 관련한 노동부 행정해석 폐기 등이 핵심이다. 이 밖에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전교조와 공무원노조 인정을 포함해 30여개에 이른다. 정부가 노정교섭에서 노동계를 동반자로 인정하고, 행정명령만으로 가능한 조치를 취하면서 '노동존중' 구호가 허언이 아님을 보여 달라는 주문이다.

민주노총은 “정부가 신뢰를 구축한 다음 사회적 대화 참여 요구를 한다면 내부에서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국노총 역시 사회적 대화 복귀를 서두르지 않고 있다. 노정교섭 정착과 지침 폐기를 비롯한 정부 조치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그런 토대하에서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와 노동기본권 보장, 사회안전망 확충, 일자리 창출, 경제민주화를 비롯한 진지한 대화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정문주 한국노총 정책본부장은 "대표성·독립성을 높이고 의제를 확대한 사회적 대화기구가 세팅돼야 참여할 것"이라며 "정부 행정명령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노동문제를 사용자단체와 대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노총은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일자리 대통령 100일 플랜'과 조각이 완료된 뒤에나 사회적 대화기구 재편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노사정 대화틀 재구성을 노사정 대화 첫 번째 의제로 올릴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 “정부는 인내심, 노동계는 책임감 있어야”

문재인 정부가 보낸 시그널은 나쁘지 않다. 공공부문을 중심으로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직접고용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노동계가 제1의 적폐로 지목한 노동부의 양대 지침 폐기 움직임도 감지된다.

남은 변수는 민주노총이다. 98년 2월 정리해고·파견근로제 도입 잠정합의와 부결을 거치면서 생긴 민주노총의 상처와 배신감은 크다. 사회적 대화기구 참가와 관련한 입장은 원론적인 수준을 맴돈다. 이창근 민주노총 정책실장은 “정부로부터 노사정위 개편 로드맵과 관련한 내용을 들어보지 못했다”며 “제안이 들어오면 조직적 논의를 거쳐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회적 대화 참여방안을 대의원대회 안건에 올리는 문제로 찬반세력이 세 번에 걸쳐 물리적 충돌을 빚었던 2005년과는 상황이 다르다. 보수정권 9년 만에 정권이 바뀐 데다, 새 정부가 이전 정부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사회적 대화를 하자고 공식제안을 할 경우 초기에는 혼란이나 논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지금의 기조를 유지한다면 노사정 대화를 거절하기 힘들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사회적 대화 참여에 긍정적인 민주노총 관계자는 “지금 당장 대의원대회 안건에 올려도 통과될 가능성이 낮지 않다”며 “비정규직 문제와 양극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노동자·국민의 요구를 외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다만 이 관계자도 “정부가 노정교섭과 산별교섭을 보장하고 '귀족노조' 같은 자극적인 발언을 삼가는 등 진정성을 보여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양대 노총이 18년 만에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 성사 여부는 결국 정부 태도와 민주노총 선택에 달린 셈이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진정성과 민주노총의 책임감을 강조한다.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과거 정부는 사회적 대화를 정부정책의 장신구쯤으로 여겨 왔다”며 “인내심을 가지고 노동계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9·15 노사정 합의 파기로 점철된 박근혜 정부는 물론이고 경제부처 입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실책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박 연구위원은 민주노총에 대해 “최종 결정이 권위를 가지도록 민주적이고 투명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며 “이 정부에서 다 얻어 내기보다는 노동계가 지향하는 노선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지금은 누가 봐도 사회적 대화를 하는 것이 유리하고 필요한 상황”이라며 “전체 노동운동사의 관점에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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