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상태에 있던 정부와 노동계의 관계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변화 국면에 접어들었다. 양대 노총이 대화와 교섭을 공세적으로 제기하자 정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모양새다. 양대 노총이 동시에 참여하는 사회적 대화가 18년 만에 성사될지 관심이 모아진다.

노사정 대화로 ‘상처’만 남은 노동계

한국노총은 줄곧 사회적 대화를 주도해 왔다.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 운영부터 주요 사회협약에 이르기까지 정부와 경영계의 주된 대화 상대였다. 투쟁과 교섭을 병행한다는 정책기조에 따라 꾸준히 사회적 대화에 참가했지만 성공 사례는 많지 않다.

한국노총은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와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제도 도입에 합의한 뒤 만만치 않은 후폭풍에 시달렸다. 복수노조를 이용한 사용자들의 노조파괴가 빈발하고, 노조간부가 줄어들면서 노조활동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민주노총도 노사정위에 참여해 정리해고 도입에 합의한 쓰린 역사를 가지고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 출범한 노사정위에 한국노총과 함께 참여한 민주노총은 정리해고와 기존 노동법이 금지한 중간착취의 일종인 파견노동 도입에 합의했다. 1998년 2월6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에 담긴 내용이다.

대신 노동계는 공무원·교사도 노조를 결성할 수 있는 단결권을 확보하고, 노조의 정치활동을 허용하는 내용의 정치자금법 개정을 약속받았다. 그해 합의가 이행되지 않자 민주노총은 노사정위 불참을 선언했고, 99년 2월24일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 탈퇴를 결정했다. 노사정 합의의 성과물이었던 공무원노조와 전교조는 십수 년이 지난 후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법외노조가 됐다. 노동계가 사회적 대화에 트라우마를 갖게 된 계기였다.

정부 주도 사회적 대화에 부정적인 노동계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기류 변화


20여년에 가까운 노동계의 부정적인 기류가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후 변화하고 있다.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하고 노사정 대표자들이 참여하는 일자리위원회 구성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일자리위에서 신뢰를 구축하고, 향후 노사정위 혹은 별도 대화틀에서 사회적 대타협을 추진하는 방식이 점쳐진다.

일자리위는 일자리정책 컨트롤타워다. 정책 기본방향을 설정하고 중장기 기본계획을 만든다는 점에서 사회적 대화기구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노사정 대화와 관련해 한국형 사회적 대화기구를 만들겠다는 점이 눈에 띈다. 해당 기구를 노사정 단체 대표들과 비정규직·하청·청년·여성 등 계층별·산업별 대표들이 참여하는 회의체로 확대·개편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이 대화에 참여하는 방향도 검토 중이다. 사회적 대화를 통해 최저임금 1만원 실현·노동시간단축·일자리 나누기 같은 노동문제 타협을 도출한다는 계획이다.

사회적 대화 성사 가능성 높아지나

정부 구상은 이미 윤곽이 나와 있다. 노동계 전략은 어떨까. 한국노총은 대선 투표 전인 이달 1일 당시 문재인 후보와 체결한 '노동존중 정책연대협약'에 따라 대정부 대화에 나설 방침이다. 양측은 정책연대협약 이행을 점검하고 노동사회 주요 현안을 논의하는 정책협의체를 구성해 문재인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정례적으로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한국노총은 사회적 대화 선결과제로 노정 신뢰 회복을 위한 행정지침 폐기를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은 지난 24일 국회에서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만나 "성과연봉제를 비롯한 위법한 행정지침을 즉시 폐기해야 한다"며 "정책연대협약을 이행하기 위해 당·정·청과 한국노총 간 시스템을 빨리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한국노총은 정부·여당과 상시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하기 위해 노정정책협의회와 한국노총-더불어민주당 간 정책협의체 구성을 추진하고 있다. 당초 일자리위에 한국노총과 추천 전문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방안을 구상했는데, 노동계 몫으로 3명밖에 배정되지 않아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한국노총은 25일 중앙정치위원회에서 일자리위 참여 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김주영 위원장에게 위임했다. 정부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자리위를 통한 대화 국면이 조성된 뒤에나 사회적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게 한국노총 생각이다. 정문주 정책본부장은 "노동존중시대를 위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결국 노동관계법 등 주요 법안을 개정해야 한다"며 "노사정 합의안이 국회 문턱을 넘으려면 사회적 대화에 국회 여야 원내대표가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참여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행정부 권한으로 가능한 노동 분야 개혁과제를 논의하는 노정 대화를 거친 다음 그 성과를 바탕으로 사회적 대화 참여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에 참여하려면 대의원대회 의결을 거쳐야 한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과거 대의원을 대상으로 노사정위 참여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했는데 총체적 교섭체제하에서 참여하자는 의견이 65%가 나왔다"며 "노사정위 참여 입장이 다수라는 점과 대화 참여를 위한 선행과제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민주노총은 노정교섭이 성사되면 최저임금 1만원 실현을 위한 로드맵과 일반해고·노동시간 지침 등 노동부 지침 폐기, 전교조·공무원노조 인정, 근로감독 강화를 정부에 요구할 계획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년 최저임금을 정할 최저임금위원회가 노정교섭을 여는 돌파구가 될 가능성도 있다. 최저임금위 노동자위원 전원은 지난해 위원회의 일방적 의사결정 구조를 비판하며 직을 사퇴했다. 갓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노동계 의견을 묻지 않고 최저임금을 결정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어떤 형태로든 노정 간 만남이 성사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창근 민주노총 정책실장은 "제안이 온다면 정부 의도를 파악하고 조직적 논의를 거쳐 입장을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김종인 수석부위원장 직무대행은 "정부가 할 수 있는 조치를 먼저 하면서 신뢰를 구축해야 검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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