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동희 공인노무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상판결 : 서울행정법원 2013구단53144 요양불승인처분취소

1. 사건의 개요
가. 들어가며

직업병 산재 인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직업병이라는 인식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특히 직업성암 사건에서 노동자가 본인의 암이 업무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로 인해 직업성암 산재신청 건수는 200건 내외에 불과하다. 그러나 산재 승인율은 2015년의 경우 48.9%(91건), 2016년의 경우 58.8%(134건)다. 2016년 기준 질병의 산재인정률이 44.1%임을 감안할 때 높은 수준이다. 전체 암 사망 건수의 4~5% 정도가 업무 관련성이 인정된다는 통계를 참고할 때 직업성암의 산재신청 건수는 매우 적다.

또한 직업성암으로 산재를 신청하더라도 산업안전보건연구원 등 역학조사기관의 역학조사가 부실하게 수행될 경우 이를 규명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실제 2016년 확정된 산재 행정소송 판결 2천156건 중 직업성암 사건은 16건이며, 노동자가 승소한 사건은 1건에 불과하다. 노동자가 역학조사기관의 부실한 결론을 규명해 직업성암을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받기는 대단히 어렵다. 당해 사건은 직업성암 등 직업병 판단방식에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 선례일 뿐만 아니라 역학조사의 한계와 의미 등을 구체적으로 판시한 판결이다.

나. 쟁송의 경위

이 사건 노동자는 한국지엠에 2008년 3월 입사해 도장부에서 자동차 바디를 도색하는 로봇을 시너와 솔벤트로 청소하는 작업, 자동차 바디 불량 부위를 샌딩하고, 페인트와 클리어 시너를 뿌리는 작업을 수행하다가 2012년 3월 병원에 내원해 검사한 결과 ‘상세불명 세포형의 만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이에 대해 역학조사를 담당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노동자가 도장부서에서 약 4년간 근무했던 점, 근무 중 벤젠 노출수준은 높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되는 점” 등을 근거로 업무 관련성이 낮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를 그대로 반영해,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와 근로복지공단은 업무상질병이 아니라고 결정했다.

2. 대상판결의 요지

공단의 불승인처분에 대해 서울행정법원(2017.2.10 선고 2013구단53144판결, 1심 확정)은 7가지 사유를 제시하면서 업무상질병이라고 판정했다.(판결문 참조)

3. 선행 고찰과제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고찰사항이 있다. 첫째 역학조사 의미와 한계는 무엇인지, 둘째 직업성암의 업무 관련성은 법률적 평가와 판단 대상이 아닌지 하는 점이다.

직업성암 산재사건은 형식적으로는 근로복지공단에서 승인·불승인 처분을 하는 외형을 가진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직업성폐질환연구소, 기타 대학병원 직업환경의학과(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위탁방식)’의 역학조사를 거치는 역학조사평가위원회의 판단에 의존한다. 따라서 역학조사 결론이 곧 산재 인정·불인정으로 이어진다.

역학조사는 기본적으로 과거의 업무환경·유해물질 사용 여부 및 노출수준을 조사하는 것이므로, 시간적·장소적·환경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특히 회사가 제출한 자료 등에 의존하기 때문에 적극적인 방해가 있을 경우 원활한 조사가 될 수 없다. 또한 역학조사는 과학적 입증과정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직업병 평가에서 중요한 과정이기는 하나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환경과 물질·노출량을 정확히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사건에서도 이미 4년이 지난 시점인 현재 업무환경과 사용하는 물질이 과거에 비해 상당한 수준으로 개선됐다. 이런 이유로 인해 역학조사는 노출된 유해물질과 그 양을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추정 수준으로 업무 관련성을 평가할 때는 장기적인 노출이 아니면 거의 산재로 승인될 수 없다. 기존 자동차공장 도장부서에서 발병한 백혈병이 업무상질병으로 승인된 케이스를 보면, 25년 이상 노출된 경우에 한정됐다.

역학조사 이후 산업안전보건연구원 또는 직업성폐질환연구소 내 ‘역학조사평가위원회’에서 조사한 역학조사 자료를 가지고 업무 관련성을 평가한다. 역학조사평가위원회는 주로 직업환경의학의사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결론은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로 송부된다. 결론을 질병판정위에서 번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직업성암 산재는 ‘역학조사 및 평가’라는 의학적 과정을 통해 판단되는 셈이다.

그런데 업무상질병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은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돼야 하는 것이 아니다(대법원 2014.6.12 선고 2012두24214 판결). 이는 법률적·규범적 판단대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최종 질병판정위 판단을 거치더라도 의학적 판단에만 구속되고 있다면 이를 온전한 법률적 판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지 하는 의문은 당연히 들 수밖에 없다.

4. 대상판결의 시사점

첫째, 대상판결은 업무상질병이 법률적·규범적 판단 대상임을 명확히 확인하고 있다. 즉 “업무와 관련된 질병의 발생은 의심되는 유해물질의 노출 누적량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미량이라 할지라도 유해물질의 영향 강도의 세기, 노출 사실의 유무만으로도 관련성을 의심해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기존 직업성암이나 다른 백혈병사건에서는 볼 수 없는 문구다. ‘노출유해물질’과 ‘누적노출량’에만 매몰된 역학조사 또는 직업환경 의학적 접근이 산재 판단방식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현재 각 업종별 벤젠 노출매트릭스 연구 결과가 이미 있다. 그 결과에 비춰 보더라도, 원고의 7년 노출 및 노출량은 백혈병을 발병시키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직업성암뿐만 아니라 업무상질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적 노출량이나 수준이라기보다 노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시점에서 이를 과학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노동자의 노출사실을 업무기인성 징표에서 가장 중요한 판단근거로 삼는 것은 당연하다. 대상판결은 상식이 역학조사나 의학적 판단에 앞선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있다.

둘째, 역학조사 한계를 제시하고 있다. 대상판결은 “원고는 한신에서 3년간 시너를 사용해 3년간 제품 밀링과 제품 세척작업을 했고, 한국지엠에서 4년간 시너를 사용해 도장작업을 수행했는데, 시너에는 벤젠이 함유돼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 사건 초기 분석에서 가장 중요했던 점은 원고의 과거 업무력, 특히 군대 시절 노출이 역학조사에 반영돼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학조사기관은 기본적인 조사 프로토콜의 원칙인 근무력 전체를 분석 평가하지 않았다. 원고는 방위산업체에서 3년간 선반가공에 종사하면서 시너 등 유해물질에 상당량 노출됐지만, 역학조사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역학조사에 반영됐다고 하더라도 누적 노출량과 수준에 매몰된 역학조사의 최종평가에서는 업무관련성이 인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 사건 역학조사보고서를 보면 원고가 사용한 전체 시너를 분석하지도 않았으며, 타 사업장의 포름알데히드 분석 결과를 원용해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역학조사가 과학적이고 엄밀한 과정을 반드시 수반한다고 보는 시각은 교정될 필요가 있다.

셋째, 입증책임 전환 필요성이다. 대상판결은 “원고에게 이 사건 상병을 유발할 수 있는 특별한 요인이 없는 상태에서 원고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 사건 상병에 이르렀고, 원고가 현 시점에서 자신의 벤젠 노출사실을 더욱 확실히 입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현재 업무상질병(재해)의 입증책임은 이를 주장하는 노동자에게 있다. 사고성 재해와 달리 고도의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직업성암의 경우에는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고 화학물질 등 유해성을 개인이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이를 위해 역학조사라는 평가과정을 거친다고 할 수는 있지만 역학조사기관의 부실한 평가와 연구를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직업성암 소송 과정에서도 역학조사를 달리 평가할 수 있는 감정기관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따라서 직업성암의 경우 반드시 입증책임을 전환하는 방식으로 법률을 변경해서, 노동자의 입증책임을 완화해야 한다.

5. 결론

대상판결은 4년의 긴 소송과정을 거쳐 1심에서 확정됐다. 이 사건 판결의 법리와 역학조사의 한계를 감안하면 향후 다음과 같이 제도를 변경할 필요성이 있다. 일단 역학조사 과정에서 당해 노동자와 대리인의 적극적 참여권 보장이다. 특히 단순한 참여가 아니라 조사신청 권리를 보장하고, 이를 역학조사기관에서 수용해서 연구해야 한다. 둘째, 평가 과정에서 참여권 보장이다. 역학조사 이후 역학조사기관 내 기구인 작업환경평가분과와 업무관련성평가분과 회의 참여권이 필요하다. 현재 누가 분과 회의에 참여하는지조차 알려주지 않는다. 셋째, 역학조사는 최소의 조사에만 국한하고 업무관련성을 평가하지 않는 방식으로 전환돼야 한다. 역학조사는 의학적 자료로서 ‘자문’ 역할만 수행하는 것이 법률(산재보험법 시행규칙 22조)의 취지에 부합한다. 넷째, 직업성 사건의 판정위원회 판단에서 법률적 판단 경향성을 강화해야 한다. 현재 직업환경전문의 주도로 평가되는 방식인데, 판정위원회에 법률가를 참여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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