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성문법 체계로서 법령에 위계 순서를 두고 있다. 제일 가는 것이 헌법이요, 그 다음이 순서대로 법률·시행령(대통령령)·시행규칙(총리령과 각 부처령), 행정규칙(훈령·예규·고시), 조례(자치법규), 규칙이다.

헌법을 바꾸려면 국민투표를 통해 개헌을 해야 하고, 법률을 만들거나 고치려면 국회 심리와 결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시행령(대통령령) 이하 법령들은 대통령이 의지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바꿀 수 있다. 대통령은 권한을 적극 활용해 현실에 산재한 적폐들을 청소해 나가야 한다. 미뤄 놓을 이유가 없다면 말이다.

이를테면 세월호에서 아이들을 구하다가 숨진 김초원·이지혜 교사가 기간제 교사이기 때문에 정부 산하 인사혁신처가 '순직' 인정을 하지 않은 어처구니없는 기계적 행정에 문재인 대통령이 시정지시를 내린 것이 그 예다. 이제 처리될 절차적 내용은 공무원연금법 시행령(대통령령)을 개정해 두 교사를 공무원연금법 적용대상에 포함하거나, 인사혁신처장이 공무원연금법 관련법상 인정된 재량권을 발휘해 두 교사를 공무원연금법 적용대상자에 포함하는 방법이다. 여하간 두 가지 방법 모두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됐다.

그렇다면 대통령의 결단과 지시로 당장 그 절차가 시작될 수 있는 노동정책을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뭐니 뭐니 해도 박근혜 정부가 쏟아 놓은 '노동개악 4대 행정지침'을 전면 폐기하는 일이다. 행정지침은 행정규칙과 같은 말이다. 내부지침이라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다. 행정지침 또는 행정규칙은 부처 내부의 행정처리 방침일 뿐이므로 원칙상 외부(일반 국민)에는 법률적 구속력 같은 것이 없다. 단순히 각 기관의 내부를 규율하는 준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말씀자료'가 행정규칙이 돼서 국가기관 각 부처에 하달되면 실질적으로 공무원들은 이에 구속된다. 어떻게든 대통령 말대로 집행을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국민에게 대외적 효력이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문제가 된다.

게다가 행정지침의 내용이 국민의 삶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이는 위헌의 소지마저 있다. 국회에서 만든 법률도 없이 대통령이 말 몇 마디로 국민 기본권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박근혜 정권에서 우리나라는 '법'치주의가 아니라 '지침'치주의라고 풍자하기도 했다.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 4대 행정지침은 취업규칙 일방개악(노동자 동의 없이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가능), 쉬운 해고, 성과연봉제 확대 도입, 단체협약 시정명령(노동자에게 불리한 개악에 간섭)이다. 어느 것 하나 국민 기본권과 생계를 위협하지 않는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노동자의 노동 3권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 없는 심각한 정책들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4대 행정지침을 즉각 폐기하는 선언을 해야 한다. 이는 낙서로 가득한 스케치북을 본래대로 하얗게 지우는 일에 불과하므로 좌고우면(左顧右眄)이 있을 수 없다. 특히 공공기관 성과연봉제의 경우 이미 시행한 30여곳의 공공기관에서 노동조합과 노동자들이 무효소송을 하고 있는데, 지난 18일 법원에서 "노동자 동의 없는 성과연봉제 도입은 위법이므로 무효"라는 취지로 판결했다(주택도시보증공사 사건).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 4대 행정지침이 얼마나 법적 근거가 없었는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다. 문재인 대통령이 성과연봉제 시행을 포함한 노동개악 4대 행정지침을 내일이라도 당장 폐기해 노사 간 소모적인 쟁송과 분규를 조속히 종결지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둘째,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인상하는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미 대선 과정에서 공약으로 2020년까지 점진적으로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인상하겠다고 공표했다. 이제 이를 위한 구체적인 행정규칙과 정책방안을 수립해야 할 때다. 최저임금 액수는 최저임금법에 따라 매년 최저임금위원회가 의결해 고용노동부 장관이 이를 고시함으로써 최종 결정된다.

최저임금위는 27명으로 구성된다. 정부측 공익위원 9명, 사용자위원 9명, 노동자위원 9명이 참여한다. 다시 말해 대통령 또는 정부의 일방적 지시와 결정으로 최저임금이 정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최저임금위에서 정부측이 노동자측과 의견을 모아 주도적으로 심의를 하면 최저임금 1만원은 무리 없이 가능하다. 다만 사용자 위원들을 설득하고 국민이 안전하게 신뢰할 만한 구체적 로드맵이 있어야 한다. 2018년 최저임금 결정시한은 6월29일까지다. 시간이 여유롭지 않다. 2020년 역시 멀리 있지 않다.

현재 최저임금은 6천470원이다. 한 시간 일을 해도 백반 한 끼 사 먹을 수가 없다. 한 달 법정시간 209시간을 꼬박 일해도 135만원밖에 되지 않는다. 월세와 휴대전화비, 교통비 등 필수비를 제하면 수십만원으로 한 달을 생존해야 한다. 최저임금으로는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진작에 선언해야 했다. 최저임금 1만원은 그야말로 최저의 요구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 필요성을 인식한 만큼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이라 믿는다.

셋째, 10%에 불과한 노동조합 조직률을 혁신적으로 높이는 일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노조 조직률 평균은 29%나 된다. 우리나라는 꼴찌 수준이다. ‘노동조합 만들면 되지 누가 뭐라고 하나’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는 현실을 전혀 모르거나 노조 조직률 상승을 반대하는 발언에 불과하다.

노조를 만들면 큰일 날 것처럼 구는 사회적·문화적 분위기를 개선해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나서기 두려워하고 사회적·경제적 강자 앞에서 나약하다. 노동조합을 만든다는 것은 그야말로 멸치가 상어와 맞서는 결기를 필요로 한다. 멸치들이 모두 힘을 합치고 모여서 상어와 대화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는 문화가 필요하다.

이미 헌법은 33조에 노동 3권을 명시해 노동조합을 하라고 북돋우고 있다.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은 “꼭 노동조합을 하라”고 연설했다. 대통령이 무소불위는 아니지만 그 한마디는 대다수 국민의 생각과 문화를 바꾼다. 문재인 대통령에게 요구한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노동조합은 꼭 해야 합니다”라고 한마디 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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