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이 과반수 노조나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강제 도입한 성과연봉제는 무효라는 본안소송 판결이 처음으로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공부문 성과연봉제 지침 폐기”를 공약한 상황에서 법원이 판결로 힘을 싣는 모양새가 됐다. 박근혜 정부가 공공부문을 필두로 확산시키려 했던 성과연봉제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법원 '사회통념상 합리성' 주장 배척

서울중앙지법 41민사부(재판장 권혁중)는 18일 금융노조 주택도시보증공사지부(위원장 양호윤)가 제기한 성과연봉제 무효확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법원은 “주택도시보증공사가 개정한 연봉제 규정은 무효"라고 밝혔다. 공사는 올해 초부터 성과연봉제를 확대 운영하고 있다. 호봉제가 폐지됐고, 1~5급 전체 직원에게 성과연봉제가 적용됐다. 양호윤 위원장은 "성과연봉제 확대로 총 연봉에서 성과에 따라 차등지급되는 임금의 비중이 20%에서 30%가량으로 확대됐다"며 "가족수당과 시간외근로수당도 사라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법원은 고용노동부를 필두로 정부부처와 공공기관들이 성과연봉제 도입과 관련해 일관되게 주장했던 '사회통념상 합리성' 논리를 배척했다. 정부는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인정되는 경우 노동자 동의 절차 없이 취업규칙을 변경할 수 있다"는 취지로 성과연봉제나 임금피크제 도입을 밀어붙였다. 법원은 "연봉제 규정 등의 개정으로 근로자가 입게 될 불이익의 정도를 고려하면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며 "연봉제 확대 실시로 근로자들이 호봉 상승으로 인한 임금상승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고, 연봉에서 성과연봉의 비율을 늘리고, 차등 지급률을 확대함으로써 일부 근로자들이 입게 되는 임금·퇴직금 등의 불이익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판시했다.

문재인 정부 '지침 폐기' 속도 낼까

절차상 문제도 지적했다. 공사는 성과연봉제 확대를 위한 취업규칙 개정을 앞두고 온라인 방식으로 직원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지부는 조사방식과 문구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조합원들에게 불참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지부의 비밀·무기명 투표에서 조합원 90%가 성과연봉제를 반대했지만 공사는 이를 강행했다. 법원은 이에 대해 "근로기준법 94조(규칙의 작성, 변경 절차) 1항에 위반돼 무효"라고 판결했다.

법원은 “피고는 소속 근로자 90%가 성과연봉제 확대 실시에 명백한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음에도 연봉제 규정 개정을 강행했다”며 “공공기관 개혁의 일환으로 성과연봉제 확대 추진의 필요성이 인정되기는 하나, 그 필요성이 근로자의 명백한 반대의사 표시에도 일방적으로 취업규칙을 변경해야 할 정도로 절실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성과연봉제 확대로 인센티브를 받았고, 임금동결의 제재를 피할 수 있었다"는 회사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다. 법원은 “성과연봉제 확대 도입을 독려하기 위한 유인책에 불과하고 이는 근로자들이 받게 되는 지속적인 불이익에 비해 일시적”이라며 “다른 공공기관에서도 성과연봉제 확대 추진으로 근로자들의 반발이 상당했고, 원고들과 같이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법원 판결은 동일한 사안으로 30여개 공공기관 노조가 제기한 소송에도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기획재정부가 지난해 초 내려보낸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지침 폐기에도 힘이 실릴 전망이다. 지침에는 성과연봉제를 전체 직원에게 적용하고, 총 연봉 대비 성과연봉 비중을 30% 이상으로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기에 도입하면 인센티브를, 도입하지 않으면 페널티를 부과하는 내용도 담겼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선 전 여러 차례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강제 도입 문제를 지적하고 지침을 폐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양대 노총 공공부문노조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는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본안소송 판결이 7월 이후로 미뤄지고 있다”며 “문재인 정부가 조만간 지침 폐기에 나설 수도 있다는 점을 감안한 움직임 아니겠냐”고 내다봤다. 사건을 대리한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관계자는 “회사는 일관되게 ‘노조가 반대만 하는 상황에서 동의를 구하지 않는 것은 사회통념상 합리적인 행위’라고 주장했는데 법원이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라며 “법원이 가처분 소송에서는 보존 필요성과 시급성을 인정하지 않아 기각했지만 본안소송에서는 근로기준법상 취업규칙 변경 절차를 위반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은 적지 않은 의미”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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