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동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해마다 5월 초에 가슴 깊은 곳에서 아프게 떠오르는 노동자. 군부독재의 끝자락인 1991년 봄의 처절했던 싸움과 죽음. 학생 열사들의 연이은 비보에 이어 초여름까지 이어졌던 노동열사 투쟁의 주인공. 노동해방의 깃발을 높이 세웠던 전노협, 한진중공업의 박창수 열사.

박창수는 60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79년 2월 부산 기계공고를 졸업한 후 81년 5월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 배관공으로 입사했다.

87년 7월25일 대한조선공사 첫 투쟁 때 과대표를 맡으며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다. 노민추 조직인 상록회·백두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문제의 90년 1월22일 3당 야합을 통해 간판을 바꿔 단 노태우 정권은 같은날 출범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를 파괴하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노동조합 탄압을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삼았다. 경찰·안기부(현 국가정보원) 등 국가권력을 총동원해 노동자 투쟁의 핵심인 전노협 탈퇴공작을 했다. 정권과 자본의 노조파괴 공격이 극에 달한 90년 7월 박창수는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 선거에서 93%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당선됐다. 이어 부산노련 부의장을 맡았다.

같은해 12월 결성된 ‘연대를 위한 대기업 노동조합회의’는 91년 2월9일과 10일 의정부 다락원 캠프에서 간부수련회를 열었다. 당시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대우조선에 대한 연대파업을 논의했다. 경찰은 수련회장을 급습해 참석자 69명 전원을 연행했다. 박창수 위원장 등 7명은 제3자 개입 금지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해고는 필연적이었다.

박창수 위원장은 수감 중이던 안양교도소에서 5월4일 의문의 상처를 입고 안양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5월6일 병원 마당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당시 구속된 박창수 열사뿐 아니라 노조간부들에게 안기부는 "전노협을 탈퇴하면 박창수 위원장을 풀어 줄 수 있다"며 갖은 공작을 했다. 그러나 박창수 열사는 "전노협이 나고 내가 전노협"이라며 국가 권력기관의 협박과 회유를 단호히 거부했다.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던 박창수 위원장은 끝내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당시 한전 입사 후 2년째 울산에서 근무하던 필자는 91년 한전위탁장학생으로 선발돼 3월부터 대학으로 파견됐다. 학생과 노동자의 이중적 신분이었는데, 회사 내에서는 방학이 있는 직장인이라서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선친과의 약속대로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게 되면서 안정적인 노동자 생활로 접어들 때였다. 상봉은 못했지만 중국의 외가 식구들과도 46년 만에 생사확인을 했다. 어머니 생전에 기쁜 일이 많이 겹치던 시기였다.

그러나 개학 후 그해 봄은 강경대 학생의 원통한 죽음으로 시작해 연일 가투의 연속이었다. 교수님들로부터 “그러다 한전으로 소환된다”는 애정 어린 압박이 연일 이어졌다. 박창수 위원장의 죽음과 노태우 정권에 의한 열사 시신 탈취는 당시 절반은 학생, 절반은 노동자였던 80년대 해고자를 물불 가릴 수 없게 만들었다.

전국적으로 진행된 열사투쟁은 6월 말 솥발산에 박창수 열사가 안장될 때까지 이어졌다. 개인적으로 91년 봄 노학연대의 치열했던 투쟁경험과 열사투쟁은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말석에서 활동하는 데 귀중한 밑거름이 됐다. 이보다 2년 전 광주교대생이던 절친 김병국의 의문사와 함께 오래도록 필자의 부족한 운동 과정에서 채찍질이 됐다. 평생 두고두고 가슴을 아리게 하는 상흔이기도 하다.

갑을오토텍 김종중 열사 투쟁이 이어지는 가운데 5월11일 안양에서 박창수 열사 26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같은날 하이디스의 배재형 열사 2주기 추모행사도 모란공원에서 개최됐다. 민주노조 파괴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26년 전과 지금 무엇이 달라졌는지, 문재인 정권이 출발한 지금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 50대 해고노동자는 깊은 상념에 잠겼다. 더 잘할 수는 없었는지, 한계 극복을 위한 비전을 후배들에게 어떻게 제시할 것인지 등 고민이 깊어만 간다.

박창수 열사가 민주노조운동을 시작했던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민주노조운동의 양적·외형적 확대와 함께 질적·내용적 성장이 분명히 있지만, 한계 극복과 새로운 비전 제시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가 죽음으로 지켜 내고자 했던 민주노조와 노동해방의 기치를 실질화하는 지향 모색과 결단적 실천이 진정한 추모 아니겠는가.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hdlee2001@empas.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