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주영 공인노무사(금속노조 법률원)

전화상담 수화기 너머 50대쯤으로 추정되는 남성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주 자리를 옮기는 요식업계 특성을 생각하면, 벌써 10여년을 지켜 온 패밀리 레스토랑의 주방을 떠나야 하는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부사장이 흰머리를 염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객을 상대하는 서비스업의 기본을 모르는 자, 염색을 끝까지 거부하면서 회사에 계속 손해를 끼치는 자로 폄하하고 있다고 힘들어했다. 주방에서 일할 뿐 직접 고객을 만나지도 않는데 말이다.

젊어 보이는 것이 미의 대세라고, 누군가는 염색을 해 주면 될 일이라고 쉽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이에 맞는 자연스러운 외모 변화를 아름답게 받아들이고 그러한 모습을 인정하고 지키는 것도 소중한 자존감의 일부다.

그는 흰머리가 섞인 자신의 머리색이 멋스럽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좋아했다. 업무상 필요성이 결여된 부당한 요구는 정당한 인사권 행사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염색을 하라”는 말이 직접적인 업무지시인지, 단지 업무상 권유에 불과했다고 볼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은 점이 있다.

그가 부사장의 발언만으로 민사상 불법행위임을 입증해 내기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아직까지 직장내 괴롭힘에 대한 규제 법령이 없기 때문에 이런 사용자의 발언을 직접 규제하기 어렵다.

그에게 되물었다. 늘상 이런 일의 시작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과는 다른 속내를 숨기고 있다. 직장내 괴롭힘의 시작은 일터에서의 사소한 갈등이나 이견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갈등의 원인인 업무상 요구나 지시들은 업무상 필요성이 인정되기 어렵거나 업무와 무관해 이행할 의무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거나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는 이유로 징계와 같은 제재를 하기 어렵기 때문에 외모나 말투를 문제 삼거나 은근히 왕따를 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괴롭히는 것이다.

잠깐 망설인 그는 괴롭힘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반년 전 회사가 직원들의 휴대전화 통화연결음에 레스토랑 로고송이 나오도록 설정하라고 지시했다. 그가 보기에 회사가 이를 강요할 권리는 없었다. 자신의 비용으로 산 휴대전화이고, 회사가 사용료를 일부 지원해 주는 것도 없기 때문에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는 휴대전화에서 24시간 회사 로고송이 나오도록 설정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전화를 걸었던 부사장이 로고송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로고송으로 바꾸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따라야 할 의무가 없다고 답했고, 그 뒤부터 흰머리를 집요하게 문제 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장 괴롭힘 행위를 중단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묻는 그에게 우선 민사소송이나 가처분 절차, 산재 신청방법 등 일반적인 법적 절차를 설명해 주는 한편, 부당인사 처분이나 일터 괴롭힘에 대한 행정감독에 소극적인 노동부보다는 국가인권위원회 차별진정을 권했다. 국가인권위원회법 2조3호의 평등권 침해 차별행위는 예시된 19가지 차별사유 중 하나로 “용모 등 신체조건”을 포함하고 있다. 즉 용모 등 신체조건을 이유로 고용과 관련해 특정한 사람을 우대·배제·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규율하고 있기 때문에 흰머리와 같은 외모상의 특징을 이유로 다른 노동자들과 구별하고, 염색을 하라고 종용함으로써 업무상 필요나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요구를 지속하는 불리한 대우는 차별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

노동자를 모욕하고 괴롭히는 행위는 일터에서 이뤄지는 불법행위로서 노동인권을 침해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사업장이라는 특수한 공동체 내에서 괴롭힘과 모욕을 통해 특정 노동자를 이등계급화(second-class)한다는 점에서 고용상 차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2~3년 전부터 노동자 인격권과 자존감을 해하는 행위에 주목하면서 직장내 괴롭힘에 대한 법·제도적 규율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이미 10년 전 “직장에서의 괴롭힘과 폭력에 관한 유럽기본협약”을 마련해 ‘한 명 이상의 근로자나 관리자가 업무와 관련한 상황에서 반복적이고 의도적으로 괴롭힘, 위협 또는 모욕을 주는 행위를 하는 경우, 직장내 괴롭힘’으로 정해 규율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대체적으로 "노동자의 권리와 존엄을 침해하거나 수치심·모욕감·두려움 등을 야기하거나 적대적인 노동환경을 조성하는 등 신체적·정신적·정서적 건강을 훼손하는 행위"로 보고 있다.

그런데 어떠한 방식으로 법적 규율을 할지, 심지어 일터 괴롭힘인지 직장내 괴롭힘인지 명명에 있어서도 아직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바로 얼마 전 현장실습생으로 전화상담원을 하던 여고생, 첫 직장이었던 드라마 조연출이 한창 젊은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안타까운 일이 반복되고 있다.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한 자괴감과 고통이 병이 돼 버리기 전에 서둘러 직장내 괴롭힘에 대한 체계적인 법제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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