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역사의 일을 하고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한다.”

소설가 권여선은 한겨레신문 칼럼에서 얼마 전 개봉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와 원작인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보고 지난겨울 촛불시민을 떠올리고선 이렇게 썼다. 언어학자인 여주인공 루이스는 외계생물 헵타포드(다리가 일곱 개인 생물)의 언어를 습득하고 그들과 같은 시간관을 갖게 된다. 인간의 직선상 시간관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가 한꺼번에 인식되는 시간관. 루이스는 결혼도 하지 않은 현재, 태어나지 않은 딸이 자신보다 먼저 죽을 미래를 알게 되지만 기꺼이 딸을 낳는 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필자는 촛불이 꺼진 초여름의 오늘, 광장이 아니라 광화문 하늘로 올라간 여섯 명의 노동자들을 떠올린다.

이들은 이인근 금속노조 콜텍지회장·고진수 세종호텔노조 조합원·김혜진 하이텍알씨디코리아 민주노조사수 투쟁위원회 대표·김경래 민주노총 동양시멘트지부 부지부장·오수일 금속노조 아사히비정규직지회 대의원·장재영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울산비정규직지회 조합원이다. 이들은 각각 정리해고(콜트콜텍)와 노조파괴(세종호텔·하이텍알씨디코리아), 비정규직(동양시멘트·아사히글라스·현대자동차) 당사자들이다. 광화문광장을 메웠던 100만 촛불이 떠나고 모두가 대선에만 관심을 기울일 때 이들은 외롭고 힘든 싸움을 선택했다. 고공단식농성.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직 철폐, 노동법 전면 재개정으로 노조할 권리를 온전히 보장하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이 글이 실리는 8일은 19대 대선 하루 전이다. 주요 대선후보들의 노동공약 중 비정규직 해법으로 문재인 후보는 ‘정부 주도 로드맵 마련’, 안철수 후보는 ‘직무형 정규직 모델 마련’, 유승민 후보는 ‘비정규직 사용총량제’, 심상정 후보는 ‘상시·지속적업무 비정규직 채용금지’ 등의 공약을 제시한 반면 홍준표 후보는 ‘노동시장 유연화 확대’를 주장했다. 비정규직 차별 문제의 해법으로 문재인·안철수·심상정 후보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내놓았지만 홍준표·유승민 후보는 언급이 없다. 비정규직의 노동 3권 보장 문제에 대해 심상정 후보만이 ‘원청의 사용자 책임’을 언급하고 있다.

지난 18대 대선에서 노동자 후보로 출마했던 김소연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은 2012년보다 노동공약이 후퇴했다고 평가한다. 다섯 후보 모두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 폐기를 언급하지 않고, 김선동 민중연합당 후보만 법 폐기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정리해고 문제도 심상정 후보는 요건 강화를, 김선동 후보만 정리해고제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생소한 말이었던 비정규직은 2017년 한국에서 보통명사가 됐다. 대표적인 비정규직 관련법인 파견법은 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 이후 제정돼 20년이 지난 지금은 ‘사람장사’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다. 2006년 제정된 기간제법은 2년 미만의 ‘하루살이’ 일자리만 만들었다. 직접고용·종신고용 원칙이 간접고용·한시고용이라는 예외와 뒤바뀐 것이다. 비정규직은 불안정과 빈곤 그 자체다. 9급 공무원시험에 청년들이 몰리고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다.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대선후보들의 공약은 현실적 대안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모두 비정규직 자체를 전제로 하는 해법이다. 20년 전만 해도 없던 비정규직은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법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것이다.

법이 비정규직을 만들었다면 법으로 없애야 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방법이다. 정리해고도 마찬가지다. 기형적인 고용형태를 원칙적인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 요원하고 이상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멀고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법을 폐기하는 것만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깨달은 노동자들이 지금 온몸을 던져 이것을 외치고 있다. 승리를 확신하는 싸움만 했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두 달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을 파면시키고 5·9 대선을 치를 수 있었겠는가. 역사가 역사의 일을 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한다. 지금은 하늘에 있는 그들이 우리의 싸움을 한다.

며칠 전 이인근 금속노조 콜텍지회장이 건강악화로 고공단식농성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남은 다섯 노동자들이 지난달 14일부터 시작한 단식농성을 이어 가고 있다. 몇 달 전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고 촛불을 들었던 우리들은 지금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선된 대통령도 지난겨울 광화문광장의 촛불정신을 잊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같은 광화문 하늘에 있는 노동자들을 먼저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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