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진보(또는 개혁) 진영이 당연하게 여기는 경제 관련 의제들이 있다. 재벌개혁과 공공부문 확대가 대표적이다. 보수세력 의제가 수출성장·규제철폐·감세 등이다 보니 이와 반대되는 주장들이 진보적인 것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도 있다. 하지만 따져 볼 쟁점이 많다.

먼저 공공부문 확대.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공공부문 일자리 81만개를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과 비교해도 공공일자리가 크게 적다는 점에서 일견 타당해 보인다.

문제는 어떤 공공일자리냐는 것이다. 공공부문의 확대가 세입과 세출의 제로섬이 아니려면 확대되는 공공서비스에 생산적 성격이 있어야 한다. 시민들이 소비할 수 있는 공공서비스의 효용이 증가하든지, 아니면 민간부문이 더 효과적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게 도와야 한다.

경찰·부사관·소방관 등의 공무원을 17만4천명 증원하겠다는 것이 그의 첫 번째 공약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치안 문제와 외적 탓에 생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닌 만큼 경찰과 군대 같은 공권력 확대가 국민경제에 생산적일 리 없다. 공시생 같은 이해관계자 일부의 표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국민경제 전체에서 보면 국가의 폭력만 늘리는 낭비다.

문 후보는 보육·교육·요양·의료 등 국민 삶의 질과 직결된 공공서비스에 대해서는 정부 책임성을 높이고, 일자리 질을 개선하는 것을 공약했다. 81만개 공공일자리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의미 있는 정책이다. 그런데 이것이 공공서비스 총량을 크게 늘리거나, 없던 일자리를 새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문 후보가 TV토론에서 밝힌 대로라면, 추가 예산도 크지 않다. 기존 서비스의 정상화 또는 개선이지 문 후보가 말하는 “더불어 성장”이니 “침체된 노동시장의 마중물”이니 하는 큰 지향과는 거리가 멀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고, 문 후보의 정책을 따져 보면 그의 공공일자리 정책은 그렇게 생산적이지도, 또 그렇게 공공적이지도 않다. 정부가 책임진다고 시민 모두에게 ‘공공(公共)’적인 것은 아니란 이야기다.

다음으로 개혁진영의 상징과도 같은 재벌개혁 정책. 문재인 캠프에서 재벌정책을 총괄하는 김상조 교수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의 재벌정책은 재벌의 경제적 집중력을 완화해 중소기업 성장의 토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재벌이 한계에 부딪혔으니 이제 중소기업이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데 중소기업이 국민경제를 끌고 나간다는 구상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대기업 주도 자본투자로 선진국 기술과 생산설비를 따라잡으며 성장했고, 이것이 현재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은 대부분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재벌대기업의 경제적 독점력이 커지고 중소기업이 과소 성장한 것도 맞다. 하지만 이것이 현재의 국민경제 자원이 중소기업에 배분되면 성장동력이 새롭게 생긴다고 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아니다.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나라 경제의 체질이 자본집약적 생산보다 노동집약적 숙련 생산에, 관료적 효율성보다는 창조적 도전에 익숙해야 한다. 현실의 중소기업은 숙련이나 창조적 도전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이것도 대기업 탓일 수 있으나 어쨌거나 현 상태는 이렇다. 문제는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 양성을 위해 필요한 창조적 노동력과 노하우 축적이 단기간에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김상조 교수는 우리 경제 상황이 시급하다며 중소기업 육성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기업 주도 경제를 중소기업 주도로 바꾸는 일은 다른 나라 사례를 찾기도 어렵거니와, 시급한 경제 대책으로 볼 수도 없다. 성공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장기 과제다. 더군다나 중소기업이 발전한 나라로 알려진 대만이나 이탈리아가 세계 경제침체에 상대적으로 더 심각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문 후보의 재벌개혁과 중소기업 육성정책은 재벌대기업 횡포에 불만 있는 다수의 중소기업 종사자에게는 그럴듯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현실의 국민경제 침체에 대한 대책이 되기는 어렵다. 재벌대기업이 악이라고 중소기업이 선인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문 후보가 공공부문 일자리 정책이나 재벌개혁 정책이 인기 영합적 정책으로 맴도는 것은 노동에 대한 문제의식 부재와 밀접하게 관련 있어 보인다. 사실 세계적으로 가장 검증된 노동시장의 마중물은 노동조합이다.

더불어민주당이 벤치마킹한 미국 민주당의 포용적 성장론은 노조 조직률과 단체협약 적용률 확대를 법정 최저임금 인상 이상으로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노조 만들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것은 물론, 노조를 만들어도 초기업적 교섭권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거시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이 '더불어성장론'이나 '일자리 대통령'을 이야기하려면 노조할 권리의 실질적 보장을 그 공약의 첫 번째로 둬야 마땅하다.

재벌개혁 역시 마찬가지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우리나라 정부는 수출기업의 비용 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수 서비스와 중소 하청업체의 비용을 규제했다. 노동조합이 작업장 교섭력을 갖춘 대기업 노조와 함께하지 못하도록 기를 쓰고 막았다. 재벌개혁 최종 목적이 중소기업 사장님 살리기가 아니라 (중소기업 노동자인) 국민 다수의 행복이라면, 빙빙 돌려 갈 필요 없이 노동자가 기업의 지불능력이 아니라 한 일에 따라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전국적·산업적 협약을 노조가 체결할 수 있도록 하면 될 일이다. 노동시장이 변하면 산업구조도 변한다.

노동조합을 일자리의 중심에, 산업정책의 중심에 세우면 문 후보가 내세운 목표의 상당 부분이 직접적으로 해결된다. 문 후보는 노조 관련 정책을 내세우긴 하지만, 사실 표를 의식한 부수적 정책일 뿐이다. 태생적으로 자본가와 더 친화적인 더불어민주당의 구조적 한계다. 그래서 노동이 당당한 나라, 노조할 권리를 앞세우는 심상정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 높은 득표율을 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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