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민 직업환경의학전문의(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이미 마음속에 뽑겠다고 점찍어 둔 후보와 정당이 있어서인지, 대선후보들의 구체적인 정책공약을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게 된다. 그래도 내가 지지하는 후보의 정책은 잘 안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돌아다니는, 자신의 생각과 대선후보 매칭률을 확인해 준다는 사이트에 들어가게 됐다. 객관식 시험문제 풀 듯 분야별로 선호하는 정책 공약을 고르면 나와 잘 맞는 대선후보를 찾아 준다는데, 헛갈렸다. 다음 정책들을 읽어 보시라.

"기업에 근로시간 기록 및 보존의무 부과, 포괄임금제와 고정 초과근무(O/T) 관행 개선, 노동시간 제한 특례업종 축소, 1천800시간대의 노동시간 임기 내 실현, 주 40시간 노동과 1주 12시간 연장근로(휴일포함)에 관한 근로기준법 준수, 11시간 연속 휴식시간 보장."

주요 대선후보들의 노동시간단축 정책이다. 어떤 정책이 어느 후보의 정책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다. ‘개혁보수’ 후보와 ‘진보정당’ 후보가 모두 노동시간을 줄이겠다고 한목소리다. 그럼 다행이지 않나. 누가 돼도 최소한 노동시간단축은 될 테니 말이다. 그런데 간단치가 않다. 다음 정책도 읽어 보시라.

"근로기준법상 초과근로시간 한도 준수, 휴일근로 초과근로시간 산입, 근로시간 제한 특례업종 축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1천800시간 이하로 노동시간단축."

이 공약은 2012년 박근혜 당시 대선후보가 내걸었던 공약들이다. 2017년 촛불의 힘으로 열렸다는 희망찬 ‘장미대선’에서 후보들이 앞다퉈 내놓은 정책공약이 이전 선거에서 나왔던 공약과 다를 바 없다니! 물론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내세웠던 공약 중 제대로 지켜진 것은 없다. 4년 반이 지나 똑같은 공약을 다시 듣고 있는 이유다.

그러니 과로와 빈곤의 악순환을 끝내기 위해서는, 노동시간을 줄여 주겠다는 공약을 믿고 기다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 4년 동안 우리는 OECD 국가 평균보다 매년 347시간 더 일하면서 ‘저녁이 없는 삶’을 지속했다. 최근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서 4천여명의 노동자들에게 직장 민주주의를 위해 하고 싶은 말을 적도록 하자 절반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정시 퇴근과 야근 근절"이라고 답했을 정도다.

장시간 노동과 스트레스로 인한 뇌심혈관질환을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과로사만 매년 300건이 넘는다. 근기법상 초과근로시간 제한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사이 근기법이 무색하게 주 70시간 넘게 일하던 여성 공무원, 집배 노동자들이 일하다 쓰러져 사망했다. 노동시간 제한 특례업종이 축소되거나 없어지지 않은 사이 특례 업종에 속한 ‘방송 프로그램 제작사업에서의 프로듀서 업무’를 보던 젊은이가, 자신은 물론 주변 노동자들을 비인간적인 장시간 노동으로 착취하는 역할을 못 견뎌 목숨을 끊었다.

일하기 위해 사는 대신 제대로 살기 위해 일하려면 저들의 공약보다는 자기 자신과 옆 자리 동료를 믿는 게 현명하다.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가 새 대통령에게 노동시간단축을 선물받는 존재가 아니다. 지금까지 노동시간을 줄여 온 것은 노동자들의 투쟁 덕분이었다.

게다가 노동시간을 줄이는 대신 불안정해지거나, 노동시간을 줄이는 대신 빈곤이 확대되는 ‘무늬만 노동시간단축’이 되지 않으려면 광장과 노동자·시민의 참여가 중요하다. 이를테면 노사정 합의, 국회의원들의 입법활동, 새 정부의 국정운영 같은 테두리에 노동시간단축 의제를 던져 두고 지켜보는 대신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목소리가 필요하다. 답은 저들의 정책과 약속이 아니라 우리의 목소리, 우리의 요구, 함께 모인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6개월에 걸친 촛불시위의 교훈 아닐까. 대선은 잔치의 끝이 아니다. 긴 무대의 새 막이 열리는 것뿐이다. 누가 당선되든, 누가 몇 표를 얻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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