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파주시 썬코어 공장에 내걸린 현수막. 썬코어노조

 

'최악의 주가조작 사건'으로 불리는 '루보 사태'가 일어난 때는 꼭 10년 전이다. ㈜루보는 자동차에 들어가는 베어링을 생산하는 작지만 경쟁력 있는 부품기업이었다.

다단계기업 제이유그룹 부회장까지 낀 작전세력은 2007년 초 2천원도 안 되던 주가를 4개월 만에 5만원대로 끌어올렸다. 주가가 5만1천400원을 찍던 그해 4월 어느 날 검찰이 작전세력을 수사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주가는 한 달 만에 3천원 밑으로 떨어졌다. 주가는 상승곡선을 그리기 전 수준으로 돌아갔지만 '상투'를 움켜쥔 개미투자자들은 그야말로 패가망신했다.

전무후무한 주가조작에 휘말린 기업, 루보는 어떻게 됐을까. 경영 자체에 문제가 있지는 않았던 터라 놀랍게도(?) 회사는 살아남았지만 경영권 부침이 심했다. 회사 쟁탈전이 벌어졌다. 10년 사이 대표가 예닐곱 번 바뀌었다.

2015년 김대중 정권 최대 게이트 사건의 장본인인 최규선씨가 루보를 인수했다. 최씨는 게이트형 비리로 복역했다. 출소 뒤 2006년 자원개발업체인 유아이에너지를 인수해 중동지역에서 자원개발 사업에 뛰어들었다. 유아이에너지는 자본잠식으로 2012년 주식시장에서 퇴출됐다. 최씨가 퇴출 3년 만에 다시 루보를 인수하자 업계에서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기업과 사업가의 만남에 주목했다.

2년이 지난 현재, 회장인 최씨는 자신이 운영하던 또 다른 회사 자금 수백억원을 횡령·배임한 혐의로 지난해 11월 구속됐다. 올해 초 건강악화를 이유로 구속집행정지를 신청해 병원에 있던 그는 이달 6일 구속 집행정지 만료를 2시간 남겨 두고 도주했다가 보름 만인 20일 검찰에 붙잡혔다.

최씨가 도주 중이던 그때 썬코어 생산공장은 결국 가동을 멈췄다. 최씨가 썬코어를 인수한 지 2년도 채 안 돼 공장이 멈춘 것이다. 약탈경제반대행동 관계자는 "최규선씨에 의해 경쟁력 있고 괜찮은 회사들이 문을 닫고 직원들은 길바닥에 나앉는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다"며 "썬코어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했다. 썬코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회사 인수 뒤 자회사 '쇼핑'=23일 썬코어노조(위원장 김주훈)에 따르면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썬코어 생산공장이 이달 12일부터 가동을 중단했다. 소재나 물품을 살 돈이 없어 공장을 가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주가 들어와도 재료가 없으니 물건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오너리스크와 자금 유출이 누적된 결과다. 젊은 직원들은 하나둘 떠났다. 150명이던 직원은 50명으로 줄었다. 임금이 밀리고 생활고에 시달리자 노동자들이 버티지 못하고 공장을 떠났다.

노조가 올해 초 '썬코어 경영정상화를 통한 직원 고용생존권 사수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대응하고 있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김주훈 위원장은 "최규선 회장은 노조에 약속한 자금 45억원을 당장 투입하고, 경영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최규선씨는 2015년 6월 특수목적법인 엘앤케이를 통해 루보 유상증자에 참여해 11.2%(351만6천129주) 지분을 확보했다. 경영권을 장악한 것이다. 인수 한 달 뒤 최씨는 방위산업체인 도담시스템스를 사들였다. 이듬해 3월에는 철강 압연용 롤을 만드는 썬테크놀로지스(썬텍) 대표이사까지 꿰찼다.

▲ 썬코어노조 조합원이 금융감독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모습. 썬코어노조

최씨는 썬코어 회장·썬텍 대표이사가 된 후 베어링과 압연용 롤 생산업체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기상천외한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지난해 8월에는 알 왈리드 사우디아라비아 왕자와의 친분을 내세우면서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200층 높이 킹덤타워를 짓고, 그 주위에 축구장 742개에 해당하는 530만제곱미터(160만6천여평) 규모의 킹덤시티를 건설하는 '제다 프로젝트'에 썬코어와 썬텍이 공동으로 참여한다고 밝혔다. 해당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자 주가가 급등했다.

최씨가 썬코어·썬텍 명의를 가지고 중동사업을 추진하면서 재미를 보는 사이 회사 경영상태는 밑바닥으로 치달았다. 썬코어를 인수하면서 산업은행에 진 빚을 일부 변제하긴 했지만, 그 외 별도 운영자금을 투자하지 못했다. 심지어 도담시스템스가 가지고 있던 빚 80억1천663만원에 대한 100억원대 채무보증을 썬코어에 떠넘겼다. 재무상황은 악화됐다. 노조는 "썬코어에 운영자금을 투입하는 대신 최씨가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 썬코어 서울사무소를 내고 회삿돈을 가져다 펑펑 썼다"고 주장했다.

김주훈 위원장은 "최 회장이 새로 (서울사무실에서) 채용한 직원 월급과 법인카드·임대료 명목으로 매월 1억원 정도를 가져갔다"고 말했다. 경영상태가 악화하면서 외부 물품대금은커녕 산업은행에 진 채무도 연체했다. 구매업체들은 떨어져 나가고 재료를 납품하는 협력업체들도 하나둘 손을 뗐다. 최씨는 이 와중에 과거 자신이 운영한 또 다른 회사인 유아이에너지와 현대피앤씨 회사 자금 430억원가량을 횡령·배임한 혐의로 지난해 11월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구속됐다.

◇오너는 도주하다 검거, 직원들은 어디로?=오너리스크 때문일까. 썬코어는 지난해 회계연도 영업손실만 219억2천200만원을 기록했다. 당기순손실 규모가 370억6천900만원에 이른다. 차입금은 연체됐고 임직원 급여는 체불됐다. 썬코어 회계감사인 도원회계법인은 지난달 감사의견을 거절했다. 감사의견 거절은 상장폐지 사유에 해당한다.

노조에 따르면 상장폐지 위기에 더해 산업은행의 가압류 압박이 거세졌다. 썬코어는 썬텍에서 60억원을 끌어왔다. 썬텍이 썬코어 주식을 사들이는 방식이었다. 일종의 돌려막기다. 이렇게 들어온 자금으로 산업은행에 20억원을 갚고 썬코어에 5억원을 투입해 밀린 대금 일부를 상환했다. 두 달 넘게 밀렸던 임직원 임금도 지급해 급한 불을 껐다.

그러면서 최씨는 노조에 이달 말까지 공장을 다시 돌릴 수 있도록 45억원을 추가로 넣겠다고 약속하고 각서를 써 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최씨는 노조에 각서를 써 준 다음날 도주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검거됐다. 혼란스러운 사태가 이어지면서 각서가 휴지 조각이 될 처지에 놓였다. 김 위원장은 "최 회장이 (검거돼) 구치소에 있기는 하지만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할 것"이라며 "최 회장은 약속한 신규자금을 투입해 경영을 정상화하든지, 경영권을 내놓고 기업을 매각하든지 양단간 결정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최 회장이 약속을 지킨다고 해도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산업은행에 갚아야 할 돈이 87억원이나 남아 있는 데다, 만약 주채권단인 산업은행이 자금회수 결정을 내려 경매절차에 들어갈 경우 직원들은 그야말로 길거리로 나앉게 된다. 노조 관계자는 "차라리 기업회생 절차에 들어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성준 약탈경제반대행동 사무국장은 "썬코어 상황을 보면 과거 스위스자본 CVC(씨티벤처캐피탈)가 만도홀딩스라는 페이퍼컴퍼니를 만들어 2005년 위니아만도를 인수해 자신들의 채무 1천159억6천500만원을 전가하고 현금유동성 위기와 구조조정을 촉발한 사례가 떠오른다"고 지적했다. 홍 국장은 "최규선씨가 썬코어의 악화된 경영상태를 방치하고, 임금과 보수·배당까지 챙겼다면 명백한 불법이자 약탈"이라며 "최씨의 경영권을 즉각 박탈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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