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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은 신성불가침 영역이 아니다장석우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 공인회계사)
▲ 장석우 변호사(금속노조 법률원, 공인회계사)

Pacta sunt servanda. 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는 뜻의 라틴어 법격언이다. 대법원은 이를 ‘계약준수원칙’이라고 표현한다. 단체협약과 같은 노사합의는 수십 차례 교섭 과정을 거쳐 신중하게 체결된 것이다.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몇몇 사건에서 법원은-기업의 경영권이 특히 존중돼야 한다는 전제하에-‘합의’를 ‘협의’로 해석하거나 노조가 합의권을 남용했다거나 현저한 사정변경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사측의 약속 파기를 용인해 왔다. 정리해고와 인수합병 등 노동자들의 근로조건 내지는 생존권과 연관된 것일지라도 말이다. 법원의 그러한 태도는 일부 사용자들로 하여금 경영사항과 관련한 단체협약은 무시해도 좋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이래오토모티브시스템(옛 한국델파이)이라는 회사가 있다. 대구지역에서 노사관계가 원만하기로 정평이 나 있던 이 회사에서, 지난 4월11일 전면파업이 시작됐다. 회사가 노조와의 합의사항을 어기고, 전장·섀시 사업부문을 분할해 신규법인을 설립하고, 중국 국영기업인 상하이항천기차기전(HT-SAAE)에 존속법인(공조사업부문) 지분 50% 이상의 매각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1년 중견기업인 이래cs는 이래ns라는 특수목적법인(SPC)을 만들어 한국델파이 지분 42.3%를 1천900억원에 인수했다. 당시 금속노조 한국델파이지회 조합원들은 우리사주조합을 만들어 이래ns에 400억원의 지분투자를 함으로써 이래측의 인수를 도왔다. 그때 노조는 이래측과 분할매각에 대한 노조의 사전합의권을 규정한 특별합의서를 체결했다. 2년마다 갱신하는 단체협약에도 합병·분할·영업양도 등에 대한 노조의 합의권이 규정돼 있다.

지난해 10월 경영설명회에서 회사는 ‘분할합작’을 추진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회사의 공조사업부문과 HT-SAAE의 자회사인 SDDAC를 합쳐 공조전문 합작법인을 설립하겠다는 것이다. 노조는 이를 분할매각으로 보고 특별단체교섭을 요청했다. 회사가 이를 받아들여 정식으로 교섭이 진행됐다. 이후 회사 계획은 합작법인 설립에서 단순 지분매각 방식으로 변경됐다.

회사는 한편으로 노조와 대화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분할매각을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회사는 올해 2월9일 노조 몰래 HT-SAAE와 공조사업부문 분할매각에 관한 기본합의서(MOU)를 체결했다. 같은달 23일에는 이사회를 열어 분할안을 주주총회에 상정하기로 의결했다. 노조는 주주총회개최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그러자 회사는 3월24일 정기주주총회에서 처리하려던 분할안을 지난달 10일 임시주주총회를 열어 미리 처리해 버렸다. 이달 7일에는 중국측과 구체적인 내용의 MOU를 체결했다. 노조에서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항의하면, 경영사항이기 때문에 자문 변호사가 일방 추진해도 된다고 했다고 한다.

주주총회를 했다고 분할절차가 종료된 것은 아니다. 1개월 동안 채권자보호절차가 필요하고, 분할등기가 완료돼야 법률적으로 분할의 효력이 발생한다. 그리하여 노조는 가처분 신청취지를 주주총회 개최금지에서 분할등기 등 더 이상의 분할절차 진행을 중지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세 차례 가처분 심문기일에서는 주로 회사의 경영상 어려움에 대한 공방이 오갔다.

대구지법 서부지원은 이달 12일 회사가 올해 8월31일까지 분할절차와 지분매각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특별합의서와 단체협약에 규정된 노조와의 사전합의권이 유효하다는 취지였다. 다만 △회사가 노조와의 합의를 더 이상 기다릴 여유가 없고 지금 분할매각을 진행하지 않으면 회사의 생존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볼 정도의 현저한 경영환경의 변화가 있었다는 점 △그러한 사정변경을 합의서 및 단체협약 체결 당시에 예측할 수 없었다는 점 △회사에 합의서 및 단체협약 이행을 강요한다면 객관적으로 명백하게 부당한 결과가 초래되리라는 점 등이 소명될 경우 회사는 구속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설시해 향후 다툼의 여지를 남겼다.

어찌 됐든 현재로서는 노조가 합의권을 남용한 것도 아니고, 현저한 사정변경이 있다고도 보기 어려우므로, 노사 간 신중한 논의를 거쳐 도출된 합의의 구속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법원의 결론이다.

경영권은 주주와 경영진의 전유물이 아니다. 채권단 자율협약이나 워크아웃 같은 구조조정 상황에서 경영진이 채권단과 합의해 경영권을 행사하는 것은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본다면 노동자의 협조가 필수적인 경우 노조와 합의해 경영권을 행사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될 수 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경영권 제한에 관련된 것일지라도.

장석우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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