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노동뉴스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일자리를 잃은 후 재취업을 위해 여기저기 알아봤습니다. 서울 모처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다음날 출근하니 사장이 그러더라고요. '사번코드가 안 나온다'고요. 고향 근처인 광주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장이 '이유를 잘 알고 있지 않느냐'고 되묻더군요. 블랙리스트가 존재하고, 대리점 사장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CJ대한통운에서 이른바 ‘나쁜 사람’으로 찍힌 박승환(31)씨의 말이다. 그가 다니던 서울의 한 CJ대한통운 대리점은 지난해 말 문을 닫았다. 박씨와 해당 대리점에서 일했던 동료들은 물건 집하 후 통상 오후 2~3시에 출발하는 배송을 거부하고 정오에 출발하자는 운동에 나섰다. 장시간 노동을 줄여 보자는 취지였다. 대리점 폐쇄 후 박씨는 택배연대노조(위원장 김태완) 활동에 참여했다. 이후 그는 여러 곳의 CJ대한통운 대리점에 일자리를 구하려 했지만 번번이 미끄러졌다. 택배연대노조는 최근 한 대리점 사장에게서 입수한 문자메시지를 공개하며 “CJ대한통운이 노조간부나 파업 참여자를 중심으로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고 주장했는데, 박씨 사례는 이를 뒷받침한다. 문자메시지에는 “박태완(46세)·박대희(36세)·김명환(44세)·박승환(31세), 위 네 명에 대해서 혹시나 각 집배점으로 취업 요청이 오면 정중히 거절하시기 바랍니다. 집배점을 교란하는 나쁜 인간들입니다”는 문구가 있었다.

CJ대한통운에 ‘나쁜 인간’으로 찍힌 택배노동자들이 17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제4간담회실에서 ‘CJ대한통운 블랙리스트 의혹 피해자 증언대회’를 열었다. 피해를 봤다는 노동자들은 공교롭게도 노조간부거나 파업 참가자, 혹은 그 가족들이었다.

파업 참여자 아내에게 씌운 '주홍글씨'

경기도 부천에서 15년간 CJ대한통운 대리점 택배노동자로 일했던 이상용(46)씨는 2015년 6월께 울산으로 내려갔다. 당시 울산지역 택배노동자들은 CJ대한통운에 수수료 인상 등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집단 운송거부에 나섰다. 그는 “파업 장기화와 노조 탄압에 맞서기 위해 사표를 내고 울산에서 동료들을 도왔다”며 “그런데 파업 후 어느 순간서부터 저는 어디에서도 일을 할 수 없게 됐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그는 어느 날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동료를 돕기 위해 지역 택배 터미널에 차를 끌고 갔다. 현장 관리자에게 “당신은 저쪽(파업)에 가담하지 않았느냐”는 얘기들 들었다. 강제로 현장 밖으로 끌려 나갔다. 어쩌다 H택배 대리점에 취업하게 됐는데 한 달 후 사장은 파업을 했던 전력을 거론하며 그를 해고했다.

불똥은 이씨의 아내 진희경(46)씨에게도 튀었다. 진씨가 증언대회에서 한 말은 충격적이다. “택배 일은 늘 사람이 부족해요. 울산에 내려가 여름철이나 명절 같이 물량이 몰릴 때 3~4개월씩 일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어떤 남자분이 다가오더니 현장에서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누구도 이유를 얘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이씨는 “파업 참여자의 아내라는 이유로 ‘주홍글씨’를 씌운 것”이라고 비판했다.

노조·시민단체 '블랙리스트 규명 대책위' 구성

고성용(42)씨는 파업 이후 CJ대한통운이 요구한 ‘위탁계약 성실 이행’ 각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는 각서를 두고 "노예계약”이라고 말했다. 이후 다른 일자리를 구한 그는 어느 더운 여름 땀 흘려 일하는 옛 동료가 생각나 휴가 중 음료수를 사 들고 찾았다.

고씨는 “지점장이라는 사람이 ‘외부인 출입 금지 안 보이냐’고 하더라”며 “일하러 온 것도 아니고 파업 참여자라고 옛날 동료들에게 음료수를 돌리는 것도 방해하는 모습에 정말 어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성욱(41)씨는 “CJ대한통운이 마지막 생존권을 보장받기 위해 파업한 택배기사들을 반역자 취급하고, 일감을 끊고 있다”고 비판했다. CJ대한통운측은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을 전면 부정하고 있다.

노조는 이날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CJ대한통운 블랙리스트 의혹 진상규명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했다. 18일부터 CJ그룹을 상대로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시위와 집회를 이어 갈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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