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어디든 문재인과 안철수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날 선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나는 둘 다 아닌지라, 흔쾌하지 않다. 홍준표가 붙으면 달리 생각하겠지만, 그 둘의 경쟁에선 누가 되건 별 차이 없다고 보는 까닭이다.

나도 한때는 그랬다. 사람이 바뀌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우리가 하면 다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이 먹어서야 깨달았다. 사람보다 중요한 건 흐름이다. 흐름을 바꾸지 않으면 사람이 바뀌더라. 흐름을 바꾸지 못하면 사람이 바보가 되더라. 흐름을 바꾸려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는 사람과 집단의 세상을 바꾼다는 약속은 공염불이고 거짓이더라.

이 기준에서 나는 문과 안의 차이를 못 느낀다. 두 후보 다, 끊임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뜯어고치려는 흐름을 만들어 오지 않았다. 앞으로의 대한민국 흐름을 확 바꾸겠다는 결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시큰둥하다. 하지만 흥미진진하게 관전하며 이쪽저쪽 거들기도 한다.

문재인 쪽은 대세가 느닷없이 무너졌으니 찝찝하고 똥줄 탈 테지만, 안철수 쪽은 순식간에 올라갔으니 흥분되고 똥줄 탈 테지만, 문과 안의 구도로 전개되는 이번 선거는 정치 흐름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결코 나쁘지 않은 구도다. 대구경북과 노인세대를 대표하며 평생 수구보수정당 후보만 찍어 대던 세력이 난생처음 중도정당 후보를 찍겠다는데, 이유 여하를 떠나 이 현상을 어떻게 나쁘다 할 수 있겠나. 아직은 반걸음이지만, 대구경북이 수구보수 후보라는 낡은 동굴에서 나오려 한다.

내 주변 여기저기 어수선하다. 누군 저 후보에게 누군 그 후보에게 줄 섰다.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굳이 날 세우진 않는다. 노동·시민·진보정치가 중심 잡으면 언젠간 되돌아올 거라 믿고 싶어서다. 이왕 간 것, 그쪽이건 저쪽이건 마음 다치지나 말고 열심히 하시라.

나는 묵묵하게 나의 길을 갈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나의 길은 심상정이다.

심상정을 생각하면 내 심경은 애증으로 복잡해진다. 배우고는 싶지만 닮고는 싶지 않았던 사람이다. 나는 심상정에게 집행력과 조직력을 배웠다. 어디 가도 기죽지 않는 밑천이 됐다. 또 다행히 냉철한 치밀함은 닮지 않았다. 앞으로도 닮을 생각이 없다. 내가, 또 주변의 누군가 좀 헐렁대고 모자라도 함께 부대끼며 설렁설렁 살아가고 싶다. 심상정과 나는 전노협부터 금속연맹까지, 꼬박 15년을 오롯이 함께했다. 심상정의 기획력과 추진력 덕분에 한국의 노동시간을 주 44시간에서 40시간 시대로 바꿀 수 있었다. 나도 벽돌 한 장 받치는 영광을 얻었다. 그 과정에서 감옥에도 갔다 왔다. 그랬는데 민주노동당 분당 때 멀어졌다. 분당 주도자 중 하나였던 나는 심상정과 격하게 다퉜다. 당시 심상정은 민주노동당 분당을 반대했다. 그러고서 10년, 심상정은 계속 진보정치로, 나는 여전히 운동 일선에서 각자의 길을 가며 데면데면했다. 나는 멀리서 심상정의 진보정치가 왜 저것밖에 못 할까 성에 차지 않을 때가 많았다.

이번 선거, 나의 기준은 촛불이다. 선거를 만든 게 촛불인 까닭이다. 촛불 과정에서 문재인과 안철수는 초지일관하지 못한 채 이쪽저쪽 눈치를 봤다.

지난겨울 우리는 촛불을 들었다. 그리고 하나의 목표를 이뤘다. 박근혜가 구속됐다. 그러나 아직 남은 목표가 많다. 촛불의 심장엔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폐엔 정권교체와 사회 재구성 열망이 숨 쉬고 있었다. 정권교체 목표는 이미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 문이든 안이든 정권교체다.

남는 것은 세월호 참사와 사회 재구성이다. 우리는 다시 불씨를 지펴야 한다. 세월호 참사를 생명과 안전의 4·16 운동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양극화 수렁에서 신음하는 비정규직·하청·청년·영세상인·여성·장애인·농민·빈민의 아픔을 해소하기 위한, 과거처럼 적당한 개혁으로 시늉만 내는 게 아닌, 대한민국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대장정, 촛불 시즌2를 준비해야 한다.

대통령에 세 번 출마한 권영길의 최대 득표는 3.9%였다. 심상정이 5%를 넘기면 노동·시민·진보정치의 경사다. 10%가 넘으면, 경사를 넘어 한국 사회 대변화가 본격 시작된다. 문이든 안이든 다음 대통령은 심상정의 공약에 압박받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좀 더 공정하고 정의롭고 안전한 나라로 밀어붙일 수 있다. 심상정은 촛불 시즌2의 불씨다. 심상정은 한국 사회 재구성의 살림 밑천이다.

지금까지 공자 왈 맹자 왈, 하나 마나 한 당연한 소리를 했다. 문과 안에 이해가 걸리지 않은 사람들, 뭘 망설이는가. 명색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들이 감정 찌꺼기나 주변 눈치에 휘둘리고 있어서야 쓰겠는가.

끝으로 나는 민중연합당과 민중의꿈이 속상하더라도 과감하게 심상정을 지지하고 선거운동에 결합하기를 바랐다. 그래야 갈등이 누그러진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노동·시민·진보정치 통합을 반대하고 긴가민가하는 사람들 마음이 바뀌기 시작할 거라고 판단했다. 민중연합당과 민중의꿈이 이미 경험한 바였고, 그들과 공유한 내 경험이기도 했다. 이른바 RO사건이 터졌을 때 함께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방어하면서, 지난해 총선 시기 울산·창원에서 김종훈·윤종오·노회찬을 함께 당선시키면서, 우리는 그 어떤 갈등도 녹여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다. 이번 대선에서도 한 걸음 나아가기를, 민중의꿈과 민중연합당의 통 큰 결단을 기대했다. 아쉽게 됐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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