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호

필리핀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서울을 올려다봅니다. 8차 '아시아·태평양지역 쿠바연대대회'에 참석하러 이곳에 왔습니다. 이 회의의 공식 일정은 4월8일에서 9일까지 진행됐습니다. 18개 나라에서 69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는데, 한국에서는 제가 몸담고 있는 '전태일 노동연구소'를 비롯한 3개 단체에서 다섯 명이 참여했습니다.

저는 이 대회에 두 번째 참여하고 있습니다. 2015년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7차 대회에 참석한 이후 2년여 만입니다. 이 대회는 쿠바의 준정부기구인 쿠바민중우호협회(ICAP)와 대회를 유치한 나라의 조직(들)이 공동으로 주최합니다. 이번 8차 대회는 필리핀 구 공산당그룹을 비롯한 두 개 그룹이 '필리핀 조직위원회'를 구성해 '쿠바민중우호협회'와 함께 주최했습니다.

공항에서 대회장으로 택시를 타고 가면서 창밖을 보니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이 대부분 중고차가 아니라 새 차였습니다. 도로 주변에 설치된 광고판에 그려져 있는 비키니 입은 여성들의 모습도 시각적으로 세련(?)돼 보였습니다. 겉보기로는 강남 3구를 뺀 서울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마중 나온 존스 갈랑 동지-필리핀 국적자로서 20년 동안 한국에서 필리핀 이주노동자들 속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목사가 된 분입니다. 이주노동자들의 공동체를 이끌면서 이들의 인권신장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에게 지난번 방문했을 때보다 자본주의화되고 발전된 듯하다고 소감을 말했더니 겉보기만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독재자 마르코스에게 살해당한 고 아키노 상원의원의 아들인 베니그노 아키노 전 대통령이 서민들이 즐겨 이용하는 ‘지프니’라는 대중교통수단을 메트로 마닐라 도심에서 운행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겉보기에 후진적으로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하는데, 정말이지 공항에서 대회가 열리는 '홀리데이 인 마닐라 갤러리아호텔'까지 택시로 이동하는 동안 창밖으로 지프니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참으로 겉보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에는 단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대회 첫째 날인 8일 저녁에는 마닐라시 시장인 조셉 에랍(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이 대회 참가자들을 환영하는 뜻에서 마닐라호텔(이름은 비슷하나 대회장과 다른 호텔)에서 만찬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그 호텔로 대표단을 싣고 이동한 대형 버스는 한국에서 사용되다 팔려 온 중고 자동차였습니다. 승객들에게 지정된 좌석을 알려 주는 안내문 글자가 한글이었고, 여기저기 한글로 된 낙서도 있었습니다. 요컨대 필리핀이 자본주의 쪽으로 빠르게 발전해 적어도 물질적으로는 상당히 나아진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갈랑 동지의 말로는 마닐라는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했습니다. 쇼핑몰에서 점심식사를 했는데, 외식 하러 그곳으로 나온 사람들은 궁한 티가 없어 형편이 괜찮아 보였습니다. 음식도 먹을 만했습니다. 그러나 지방과 시골에서는 대다수 민중이 여전히 가난한 삶을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마닐라는 필리핀의 내외 자본가계급에 의해 자본주의 쇼윈도로 육성되고 있었습니다. 쇼윈도가 모두 그러하듯이 그것은 외화내빈이었습니다. 만찬을 겸한 연회가 열린 마닐라호텔 부근에는 지프니가 줄지어 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로 뒤쪽으로 가면, 또 시 외곽으로 가면 가난한 민중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곳에서도 자본주의가 절대 다수 민중을 가난하게 만드는 체제임을 볼 수 있습니다. 소수에게는 좋은 음식과 옷과 집과 자동차와 놀이와 기타 등등 온갖 좋은 것들이 제공되지만 말입니다. 마닐라호텔로 가는 중에 마닐라항 해안도로를 지났습니다. 호수처럼 조용한 항구에는 세월호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흰 배가 떠 있었습니다. 마닐라항에 일주일쯤 떠 있다가 동남아로 떠나는 배라는데, 여객선이 아니라 관광용 유람선이라고 합니다. 배 안에서 돈 있는 사람들이 카지노 같은 도박도 하고 춤추며 놀기도 하는 곳입니다.

8일 오전 9시 반부터 '여는 마당'이 진행됐습니다. 개막식에는 쿠바민중우호협회 참가단 단장인 마르타 로하스 여사가 연설을 했습니다. 그녀는 1953년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지들이 감행한 몬카다 병영 공격 및 그 전투에서 살아남은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지들의 재판을 뉴스로 보도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피델의 유명한 최후변론인 “역사가 나를 사면할 것이다”를 최초로 정리해 책으로 출판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녀의 감동적인 연설에 이어 필리핀 정부 당국을 대표해 참석한 보건부 장관의 연설이 있었습니다. 그 역시 여성이었고, 또 의사였습니다. 그는 현 대통령 두테르테가 민다나오 다바오 시장으로 재직할 당시 휘하에서 보건관계 일을 했다고 합니다. 두테르테가 대통령이 된 후 그의 요청으로 중앙정부 각료로 일하게 됐는데, 대통령은 그에게 쿠바에 가서 보건·의료 시스템을 배워 필리핀 보건·의료체계를 10년 안에 쿠바 모델로 개조하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필리핀에는 지금 1억 명 인구 가운데 3천만 명이 의료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독재자 마르코스를 쫓아내고 정치를 민주화했다고 하는 필리핀의 현주소입니다.

민중의 가난과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모델까지 적극 채용해야 함을 이곳에서도 확인하고 있습니다.



전태일을따르는사이버노동대학 대표 (seung742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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